슬픔은 나의 것

나의 정체성에 관하여

by 도씨



요즘 누군가 내게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꼭 슬픈 사람이라고 답하고 싶다.

슬픔은 나의 친구이자, 내 정체성이므로.


수많은 감정의 색채가 있지만,

나를 겪어낸 사람들이나 처음 본 솔직한 사람들은

항상 우울과 어두움을 꼽았다.

보통 무채색이나 회색빛으로 대표되는 감정들.


어느정도 나이가 차면 자신의 얼굴에도 책임을 져야한다고 했다.

나의 얼굴,낯빛, 분위기 .. 거울을 보고 뜯어봐도 햇살처럼 따뜻하고 가벼운 어떤 것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타고나길 그런 나의 낯빛이 자주 싫었다.


책임?

그 책임을 왜 내가 져야하지?

운명이 나한테 두고 갔을 뿐인데?


그래서 나는 타고난 나를 오랫동안 싫어했다.


엄마는 어려서부터 그런 나를 이미 알고 있었던 거 같다.

항상 입꼬리를 꾹꾹 눌러 올리며 도씨야, 웃고 다니라 했다.

너의 웃는 얼굴이 얼마나 해사한지 예쁜지 아느냐면서.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과한 애정담긴 소리겠거니

오래된 유행가 가사처럼 흘려 들었다.


웃을 일이 있어야 웃지.. 안 그래 엄마?

엄마도 결국 죽고 아무도 없는 딸인데..


입꼬리를 누르던 손의 압이 기억나 미소가 아니라 쓴웃음을 지었다.






배우 최강희는 정말 좋아하던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에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엉뚱한 점은 눈물,콧물을 닦은 티슈마저 소중해 버리지 못하고 모아뒀다고 했다.


나는 우연히 브라운관에서 그녀를 볼 때마다 그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아 좀 드러워..

근데

슬픔이 소중할 수가 있나?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묘한 공감이 갔다.

그 공감의 정체가 어떤 것이었는지 정의할 순 없지만 너무나 그 이야기가 공감이 갔다.


저장하고 싶은 슬픔.

감정의 잔열인 슬픔마저 소중해 간직하고 싶은데 , 형태가 없으니 휴지에 담아 보관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


그러고보니 슬픔은 그 자체로도 소중했다.

나는 슬픔과 우울과 친하게 지낸 덕에, 다른 이의 슬픔을 잘 알아본다.

공감 능력도 아주 좋고, 아픔에 대한 이해도 남다르다.


슬픔과 우울을 많이 가졌다는 우월감이라기보단

세상의 모든 슬픔에 관한 이해의 폭이 넓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가 좀 더 글쓰기 쉽게 해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

슬픔에 길들여진 나를 박박 씻겨 햇살에 널어 말려

밝고 티없이 맑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럴 수 있는 비누는 없다.


슬픔을 다룰 줄 몰라, 삶이 비누처럼 미끄러져 나가 가만 쥐어 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내게서 슬픔을 박탈하지 않기로 했다.


소중해서 휴지처럼 버리지 못한 동동대며 쥐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함부로 버리지도 않는다.


그저 내 삶 한켠에 켜켜이 묻어 조용히 두고 산다.


필요할 때 꺼내어 보고,
필요할 때 으깨어 글을 쓰고,
다시 덮는다.


슬픔은 나의 것,

영원히 떠나지 않을

나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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