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스무살

늦은 독립

by 도씨


엄마가 살아있을 때에 나는 서른을 넘어서도 완전한 공주님이었다.

좋은 의미의 공주는 아니었다.


엄마랑 단 둘이 살면서도

청소,빨래,요리, 설거지 뭐 하나 엄마 손을 타지 않은 것이 없었고,

돈 버는 유세랍시고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엄마의 일방적이고 헌신적인 짝사랑으로 인해 나는

집안일에 대해서만큼은

버르장머리도 눈치도 전혀 없는 외면하는 공주님이었다.


하지만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엄마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던 일은 공주님에서 나를 강등시켰다.


간단한 세탁기 조작법에서부터, 내가 나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정리하여 넣는 법, 화장실 청소 주기까지...

신데렐라라기엔 너무나 현실적인 생활에 부딪혀버렸다.

신데렐라는 유리구두 신고 무도회라도 갔지..

이건 유리구두도 신지 못하는 완전히 생활 중의 생활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몰랐다.


동생의 빡센 특훈으로 이제는 좀 자리잡았지만,

처음에는 강등된 하녀 신분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하다보니 깨달았다.

사람이라면, 사람이 혼자 바로서려면 저 정도의 것들은 기본적인 것이었다는 걸.

하녀 된 기분도 나에겐 과분한 말이었다.

하녀는 일이라도 잘하지..


자존감은 추락했고, 생활 곳곳에서 나의 한계를 보았다.

무얼 해도 제대로 끝내는 게 없었다.


설거지는 하고나서도 제대로 닦이지 않은 게 있었고,
청소는 대충해서 먼지가 그대로 남았고,
빨래는 잊어 세탁기 안에서 하루를 더 보내기 일쑤였다.


나는 여전히 공주병에 걸린..아직도 여물지 못한 어른이었다.

다른 이들은 자라나면서 이미 배웠을 기초적인 것도 몰랐다.


더 힘들었던 건 그저 생활이고 습관이기때문에

아무도 나를 칭찬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집이 , 빨래가 아무리 깨끗해도, 야무지게 밥을 해먹어도
누구도 우리 큰 딸 잘했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다 쉽게 그저 지겨워져서 다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죽고싶단 생각을 했다면 너무 우습지만 나는 그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망치고 싶진 않았다.

아니 도망갈 곳이 없었다.


못해도
망쳐도
늦되도

이제는
누군가의 공주님으로 돌아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득 좋아하는 영화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완전히 혼자가 된 조제를 버리고 가면서 남자 주인공은 길바닥에서 엉엉 운다.

혼자이자, 걷지도 못하는 조제는 의자에서 다리없이 폴짝 뛰어내리면서도

요리를 척척 해내는 뒷모습을 보여준다.


왜 그 장면이 생각났을까.

사지멀쩡한 내가 이 정도 일은 해내고도 남는다는

역겨운 위로였을까.


아무튼 나는 그래서 오늘도 살아내는 중이다.

완벽한 설거지도, 완벽한 청소도 , 완벽한 빨래도 아니겠지.

하지만 하루를 열심히 살아 끝낸다.


여전히 느리고, 너무 늦었지만

이제는 그것들 모두 내 몫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스무 살이다.

아무리 버려졌어도, 아무리 힘이 없어도 ,

엄마조차도 없는,


결국


아무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 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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