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겐

by AN

Nor-Way. 북쪽으로 가는 길. 명쾌한 이름부터 마음에 든다.

베르겐. 노르웨이 피오르드 여행을 위한 첫 도시이다. 베르겐 공항에 내리니 8월인데도 찬 기운이 느껴진다.

‘겨울왕국의 느낌이 물씬 나는구먼! 좋아!’

이제 캐리어만 찾으면 진짜 노르웨이로 나간다. 왕군 캐리어 도착하고, 컨베이어 벨트 멈추고, 캐리어를 토해내는 구멍은 닫히고. 내 캐리어는? 내 캐리어는 어디 갔지?

분실 수화물 신고센터에 가니 이미 이삼십 명의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저 앞에서 항공사 직원이 노르웨이 말인지, 영어 인지도 모를 말로 뭐라뭐라 말한다. 이삼십 명 중 누군가가 말한다.

“뭐래?” What did he say?

“짐 없대.” No more bags.

바이킹 모자를 쓴 청년이 답하자 사람들은 일제히 각자의 나라 말로 욕을 해댄다. 나도 우리나라 말로 욕을 쏟는다. 사무실 안의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창구를 열고 열린 창구로 사람들이 흩어진다. 꽤 오랫동안 기다리고 나서야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앞사람과 같은 일이요.”

다 알면서 왜 물을까 싶다. 내 캐리어에 대해 설명하고 직원에게 묻는다.

“그런데 난 이제 칫솔, 치약도 없어요. 생필품을 보상해주는 것이 있나요?”

직원이 씩 웃으며 비행기에서 주는 칫솔, 치약이 든 파우치를 가져다준다.

" 쉿, 다른 항공사 것인데 당신한테만 주는 거예요.”

아니다. 이게 다가 아니다. 항공사의 실수로 수화물이 지연될 경우, 수화물이 도착할 때까지 생필품을 구입하는 비용을 항공사에서 지급한다. 항공사마다 규정이 다른데, 지연 1일당 현금으로 지급하는 경우도 있고 일단 생필품을 구입한 후 영수증과 함께 청구하면 항공사에서 구입비용을 지급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꼭 필요한 서류가 ‘수화물 분실 신고서(PIR)’이다. 수화물 분실 신고를 하면 항공사에서 PIR 서류를 한 장 준다. 이 서류는 항공사에 비용을 청구할 때도, 개인적으로 가입한 여행자보험에 보상 신청을 할 때도 필요하니 돌아오지 못한 캐리어만큼 소중히 보관해야 한다.


베르겐은 오슬로에 이은 제2의 도시라지만 호젓하게 둘러보기 좋은 작은 도시다. 물론 베르겐이 작다고 느껴지는 것은, 내가 작곡가 그리그의 집이 있는 트롤하우겐도, 노르웨이 최대 크기라는 베르겐 아쿠아리움도, 한자 동맹의 위상을 뽐낸다는 한자박물관도, 베르겐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플뢰옌 산도 안 다녀왔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8월치고는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인공호수공원을 지나 어시장을 향하여 걸으며 따끈한 생선 수프와 어묵으로 몸을 좀 녹여가며 브뤼겐 지구에 이르는 것만으로도 베르겐을 느끼기에 부족하지 않다. 나는 가는 길에 즐비한 쇼핑센터나 옷가게, 인테리어 소품 가게 등을 훑으며 추운 8월을 견딜 외투를 점찍는다. 노르웨이 근해에서 잡히는 생선류를 파는 포장마차가 늘어선 어시장에서는 기대보다 작은 규모에 비싼 가격, 중국인 점원의 익숙한 중국어 호객 등으로 잠시 실망할 뻔도 했지만 <겨울왕국> 속 아렌델의 뾰족 지붕 집들이 그대로 빠져나온 듯한 브뤼겐에 다다르면 ‘그래! 여기는 북유럽이지!’ 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실제로 영화 <겨울왕국>에서 아렌델 왕국의 마을의 모델이 된 브뤼겐 지구는 13세기 당시의 모습을 살려 재건해 놓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이런 의미를 빼더라도 이국적인 건물, 건물들에서 파는 질 좋은 가죽 제품, 액세서리, 크리스마스 용품 등을 건물 2-3층까지 오르내리며 구경하다보면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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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겐 지구의 노천 카페에서 커피와 설탕빵을 먹으러 사람 구경, 경치 구경, 기러기 구경을 한다. 카페 앞에 설탕빵 사진이 있길래 노르웨이 전통 음식인 줄 알고 주문했는데, 맛을 보니 아닌 것 같다. 이렇게 맛없는 그냥 설탕 뿌린 밀가루를 전통음식이라고 생각한 것은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실례인 것 같다.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왕군과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 같이 살아갈 이야기, 카페 옆 “NIGHT CLUB”이라고 쓰여있는 건물은 진짜 춤추는 나이트클럽일까 등을 이야기하다 너무 추워서 자리를 뜬다. 비싸고 맛없는 빵은 노르웨이 기러기를 위해 기증하고 쿨하게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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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에서부터 많이 걸은 것 같지 않은데 벌써 중앙역 근처 호수공원에 다다랐다. 여행객의 한가로움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이런 공원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왕군과 나는 호숫가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다시 이야기를 나눈다. 참 좋다. 이 여유, 오순도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여행이 주는 선물이다. 지구 반대편 북쪽 노르웨이 호수공원에 앉아있으니 문득 ‘동네에 있는 공원에 갔던 적이 있었던가.’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을 먹으면 가까운 곳에서도 여유를 누리며 오순도순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곳, 먼 곳을 여행하는 것만큼 내 동네, 내 가까운 곳을 여행하는 것도 더 가깝게 손에 잡히는 행복을 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가까이 있는 소중한 파랑새를 모른척한 것은 아닌가 싶다. 돌아가면 내 주변 장소, 내 주변 사람을 다시 돌아봐야겠다.


이런저런 이야기,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보니……춥다. 캐리어 속 바람막이는 언제 입을 수 있을지 모르겠고 지금 입고 있는 가디건만으로는 차디찬 바람에 자연건조 미이라가 될 것 같다. 패딩 자켓을 사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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