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파리이다. 내가 파리를 다시 방문하기로 한 것은 정말이지 왕군을 위한 순수한 희생정신의 발로이다. 파리는 나에게 무매력의 도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군도 ‘실제 에펠탑’을 본 경험을 갖게 해 주겠다는 큰 사랑과 희생의 마음으로 파리를 여행지에 넣었던 것이다.
파리는 누군가에게는 혁명의 도시, 누군가에게는 사랑의 도시, 나에게는 지린내의 도시이다. 첫 방문 때에 지하철역마다 진하게 배어있던 지린내의 기억이 강렬하다. 나는 파리 외곽에 위치한 숙소를 얻은 덕분에 지린내는 더 이상 원도 없이 맡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파리의 ‘핫 플레이스’, 지하철 이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은 곳으로 숙소를 정했다. 바로 마레 지구이다.
마레 지구는 ‘개인 디자이너들의 아기자기한 가게, 카페 등이 모여 있는 가장 파리지앵스러운 잇 플레이스’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파리를 누리는 젊은이의 핵 같은 장소인 마레 지구에 숙소를 잡아야겠다! 그러고 나서 후회했다! 마레지구는 설명대로 아기자기한 가게, 디자인 샵 등 구경거리가 많은 곳이었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도 아기자기한 디자인샵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굳이 찾아가지는 않는 곳에 며칠씩 근거지를 두고 다니려니, 구경거리도 이동 수단도 불만족스러웠다.
그래도 마레 지구에 숙소를 얻어 만족스러운 것이 물론 있다. 7호선 Pont marie역 앞 빵집의 빵이 정말 맛있다. 아침마다 계산대 앞에 현지인들이 줄을 서는 모습을 보고 왕군과 나도 이것저것 빵을 담았는데, 첫 파리 방문 때 먹어봤던 빵과는 다르게 ‘이것이 파리의 빵이구나!’ 싶게 맛있었다. 파리하면 바게트지 하는 마음에 바게트를 골라 담았는데 막대기 같은 바게트를 그대로 준다. “바게트 잘라주세요.” 하자 가게 주인이 별 이상한 애들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더니 옆 점원에게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한다. 옆 점원이 놀란 표정이 된다. 아마도 “이런 희한한 애들 좀 봐. 이걸 잘라서 달래. 왜? 아예 붕어빵 사면서 비늘 제거해달라고 하지? 별소리를 다 들어보겠네.”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러더니 잔말 말고 그냥 이대로 먹으라고, 세상에 누가 바게트를 잘라먹냐고 하면서 (물론 나는 불어를 전혀 모르지만, 가게 주인은 이렇게 말한 것 같다.) 그냥 들이댄다. 어이없고 민망하고 이건 뭔가 싶기는 했지만 빵이 맛있으니까 그냥 주는 대로 들고 나온다.
빵을 씹으며 ‘그곳’으로 향한다. 파리의 그곳에서는 누구나 마ㅎ담이 된다. 바로 샤넬매장이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가봐야지. 샤넬 매장에는 사람이 많다. 가보자. 매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내 귓가에 대고 “봉쥬르, 마ㅎ담.”하며 점원이 다가온다. 친구가 불어를 할 때에는 혀 밑에 ㅎ을 품고 있다는 느낌으로 발음을 하는 것이라고 했었는데 그 말뜻이 무엇인지 이제 알겠다. “지금은 모든 점원들이 손님 응대를 하고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줘요 마ㅎ담.”이라고 하는데 내가 진짜 고귀한 마담이 된 것 같은, 그래서 이런 고가의 가방쯤은 고민 없이 사들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착각이 든다. 다행히도 매장에는 손님이 너무 많아서 내가 착각에서 빠져나와 내가 이걸 왜 기다리고 앉아있나 싶은 생각이 들 때까지도 점원은 나에게 오지 않았다. 다행이다. 샤넬 매장 문을 나선다. 매장 문을 나오는 왕군의 발걸음이 굉장히 경쾌한 것 같다.
또 다른 파리의 명소 몽마르뜨 언덕으로 향한다. 첫 방문 때 사크레쾨르 성당 앞을 지나면서 “몽마르뜨의 아티스트들은 다 어디 갔냐고. 이 아티스트들이 게을러서 아침에는 안 나왔다고.” 투덜거렸는데, 몽마르뜨의 아티스트들은 사크레쾨르 성당 뒤편에 아지트를 잡고 있었다. 성당 앞 잔디밭에 앉아서 일광욕도 하고 사람 구경도 하고 왕군과 수다도 떤다. 좋다.
언덕에서 내려와서도 구경거리는 계속된다. 기념품 가게도 많고 특이한 소품을 파는 가게들도 많다. 야바위꾼들도 즐비하다. “어, 야바위다!”라고 말하고 ‘다 사기래.’하는 말은 굳이 말 안 해도 아는 것 아닌가 싶어서 속으로 삼킨다. 야바위꾼 아저씨 둘레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 돈을 걸고 야바위를 하고 있다. 왕군과 나도 구경한다. 컵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사람들이 돈을 거는데, 왕군이 갑자기 주머니에서 50유로 지폐를 꺼내 돈을 건다. 나는 여태까지 이 남자의 주머니에서 이렇게 자신 있게 돈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기가 막히다. 야바위에 돈을 걸다니! 야바위를 하던 2-3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50유로 더 내라고 소리를 친다. 100유로가 기본이라나. 이제야 왕군은 ‘당했다’ 하는 얼굴로 내놓은 50유로를 다시 달라고 하지만 그 말이 먹힐 턱이 없다. 한패인 야바위 일당들의 돈을 내놓으라는 목소리는 더욱 커진다. 그들의 표정과 분위기 상 쌍욕을 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퇴각이다. 어차피 50유로를 다시 돌려받을 길은 없다. 왕군은 아직 빠진 얼이 돌아오지 않은 얼굴이다. 분명히 자기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고, 하지만 자기가 너무 자만했다고 자기반성을 시작한다. 자기가 사기당한 것을 믿을 수 없다며 그들의 수법이 무엇인지 보자며 다른 야바위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한다. 왕군에게 누군가 다가와 은밀하게 말을 건다. “정말 재미있어 보이지? 나도 이거 해서 이만큼이나 돈을 땄어. 너도 가서 해봐.” 모든 야바위꾼은 일당이 있구나 싶다. 그때 우리 옆을 지나는 한국인 단체관광객을 인솔하는 가이드가 이 거리에 대해 설명하며 지나간다. “야바위꾼들이 많죠? 다 사기입니다.” 왕군의 표정이 다시 한번 허망하게 바뀐다.
왕군은 야바위 사기의 충격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50유로면 어제 온라인 예약 수수료를 아끼려다 매진돼서 못 산 파리 생제르망 축구 경기표도 살 수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그래도 자기가 사기당해서 다행이지 만약 사랑하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속임을 당했다면 자기는 그들에게 화가 나서 막 싸웠을 것이라고 한다. 아니, 내 생각엔 왕군이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나도 그런 면이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는 참으로 관대하다.
“괜찮아. 경험이지 뭐.”라고 말했지만, 사실 나도 그 돈이 아깝긴 하다. 그 돈이면, 어제 문 앞에서 발길을 돌린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한 끼를 먹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제 저녁 나는 왕군에게 미식의 도시 파리이니까 근사한 데서 저녁 식사를 하자고 했다. 트립어드바이저 평점 순위를 보고 찾아간 식당은 생각보다 훨씬 고급스러웠다. 오늘은 저녁 식사에 큰돈을 쓰리라 마음을 먹고 찾아온 나도 그 고급스러운 문 앞에서 주춤하게 됐다. 왕군이 “꼭 여기서 먹고 싶어?”라고 묻는데, 조금 치사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나도 “응! 여기서 먹자!”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고 작아졌다. 결국 왕군과 나는 만만한 식당을 찾아 다시 헤매고 헤매다가 식당은 안 보이고 배는 고프고 해서 루브르 박물관 바로 앞의 식당에 들어갔다. 나는 세비야 대성당 바로 앞에서 반은 얼어있고 반은 녹아있는 냉동 추러스를 비싼 가격을 주고 먹은 다음부터 관광명소 코앞의 식당은 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루브르 박물관 바로 앞의 식당? 마음에 안 든다. 딱히 먹을 메뉴도 없다. 피자나 시킨다. 이탈리아였다면 맛 좋은 피자 한판을 먹었을 가격으로 피자 한 조각을 주문한다. 음식이 나오고 나서야 이 식당의 음식값이 이렇게 비싼 이유를 알았다. 아무래도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유서 깊은 피자를 갖다 주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피자가 이렇게 고무를 씹는 듯한 독특한 질감에 네안데르탈인이 먹었을 것 같은 맛일 수가 없다. 다시 한번 결심했다. 관광명소 바로 앞의 식당은 가지 않겠다.
그래도 식사를 마친 밤 시간 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미드 조형물이 빚어내는 야경, 흑인들이 파는 모형 에펠탑과 열쇠고리를 산 것, 근처 호텔 화장실을 급하게 이용하고 나오다가 매시 정각 반짝이는 불빛의 에펠탑을 본 기억은 피자 맛보다 더 오래오래 내 마음속에 기억되어 마음속 불빛을 켜주고 있다.
그래,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낮에 본 세느강은 똥물이었지만 밤에 유람선을 타고 유람한 세느강의 풍경은 낭만적이기 그지없다. 왕군이 노트르담 성당에서 에펠탑까지 걸어가자고 던진 농담을 내가 덥석 받아들여 한 시간 남짓 걸으면서 수많은 노상방뇨 자국을 보고, 강 옆 둔치에서 공용 운동기구로 우리도 운동을 하고, 현지 노인들이 모여 라인 댄스를 추는 것을 보면서 그래 이게 사람 사는 풍경이지 하는 여유도 누렸다. 늦은 밤 왕군과 손잡고 ‘한강이 수량으로 보나 수질로 보나 세느강보다 훨씬 멋진데 왜 세느강이 더 유명할까?’ - ‘세느강변에는 스토리가 있는데 한강변에는 아파트만 있어서?’라고 대화를 주고받으며 강변을 걷는 것도 파리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기억을 간직하고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아침 일찍 공항으로 가는 길에 벽 쪽으로도 아니고 큰 길가에 대고 노상방뇨를 하고 있는 파리지앵을 보았다. 으, 역시 파리는 나랑 안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