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당신들이 동의한다면……. 동의하지 않아도 되는데, 만약에 당신들이 동의한다면 말이지요…….”
스톡홀름행 항공 티켓을 받으려는데, 공항 직원이 매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가 예약한 비행기가 오버부킹 되었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2시간 늦게 출발하는 비행기에 탑승한다면 각 200유로씩 2인 400유로를 지급하겠다고 한다.
“암요, 암요. 당연히 동의하죠!”
여행자에게 시간은 금이지만 2시간에 400유로까지는 아니다.
설명을 들은 대로 좌석번호 대신 SBY라고 적힌 대기 티켓을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비행기 탑승구로 가서 티켓을 내밀었는데! 체구 좋은 직원은 친절하게 기다려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 행운에 대해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2시간 후 표를 당장 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약간 초조해하면서 들뜬 마음으로 10분을 보낸다. 10분 후, 친절한 직원이 웃으며 이야기한다.
“기쁜 소식입니다! 기다려줘서 고마워. 자, 여기 프라이어티 탑승구를 이용해서 바로 탑승하세요.”
“네……. 기쁘군요…….”
왕군은 그 당시 내 표정이 먹이를 쫓던 하이에나가 눈앞에서 먹잇감을 놓친 듯한 표정이라고 했다. 왕군은 관찰력이 참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던 400유로도 허공으로 날아가고 우리도 스톡홀름으로 날아갔다.
중앙역 근처 숙소에 짐을 풀고 스톡홀름을 쏘다니러 숙소를 나선다. 다른 아무것도 생각해야 할 것 없이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하며 발 닿는 대로 움직이는 이 시간, 여행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이 호사로움이 행복하다. 떠나오기 전 지도만 보고 무슨스탄, 어쩌구가탄 어려운 이름들에 기죽어 있었는데 막상 오니 어디를 가도 마음은 들뜨고 발걸음은 가볍다. 역시 직접 부딪쳐 볼 일이다.
구시가지인 감라스탄부터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소라는 세르엘 광장까지 돌아보고 숙소로 향한다.
“마트에서 간식거리 좀 사갈까?”
“야, 이 마트 사람 엄청 많다. 우리도 들어가자.”
마트에 들어가니 계산대 대기 줄이 명절 고속도로처럼 정체다. 장바구니를 들고 마트 이곳저곳을 누비는 인파를 뚫고 우리도 부지런히 움직이는데, 어라? 뭔가가 이상하다. 여기도 술, 저기도 술, 여기는 술마트다!
“여기가 그 술 가게인가 봐!”
스웨덴에서는 알코올 도수 3.5 이상의 술은 국영 술 판매장에서만 살 수 있다. 사람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장바구니에 술을 꽉꽉 채워 담았다. 우리도 스웨덴 국기가 그려진 맥주는 모두 골라 담고 긴긴 대기 끝에 계산원을 만난다.
“아이디카드?”
“우리 지금 여권 안 가져왔어요. 우리 나이 많아요.”
“SORRY. 술을 사려면 누구든 신분증이 있어야 합니다.”
돌아보니 자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모두들 손에 술 바구니와 신분증을 들고 있다. 입구에서 제발 들어가게 해 달라며 애원과 짜증을 동시에 부리는 손님들과 마감시간이라며 이들을 막는 직원 옆을 유유히 지나 되돌아 나오니 마치 승자가 된 듯하다.
“훗, 우리는 숙소가 바로 이 옆이지. 우리는 내일 다시 와서 살 거야. 후후 훗”
하지만 내일-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 그제야 미친 듯이 술병을 담던 사람들이 이해되면서 ‘과연 이런 식으로 술을 판다고 술 소비량이 줄어들까? 오히려 더 쟁여놓는 것 같던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술은 무슨 술, 현실은 술 대신 맹물이나 먹어야 할 판이다. 나는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수돗물을 식수로 먹어도 된다고, 어차피 호텔 복도에 있는 얼음 정수기도 다 수돗물 얼린 것 일거라 하고 왕 군은 그래도 수돗물을 먹는 건 찝찝하다며 지나가는 호텔 청소원에게 호텔 복도에 그냥 정수기는 없는지 물어본다. 호텔 청소원은
“We Swedish also drink the tap water. 우리 스웨덴 사람들도 수돗물을 마셔요.”라고 친절하게 답한다.
We Swedish……. 나는 대답 내용보다 제3세계 출신으로 보이는 그녀가 We Swedish라고 말한 것에 더 꽂힌다. 어떻게 Swedish가 되었을까? 스웨덴 사람과 결혼(혹은 동거)한 걸까? 이 호텔에서 신원보증을 하면서까지 채용해서 거주허가를 받게 해 주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난민 신청을 해서 스웨덴으로 온 걸까?
스웨덴은 난민을 받아들이는 데에 매우 우호적인 나라이다. 스웨덴 이민국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스웨덴으로의 망명을 신청한 사람은 2013년 약 5만 명, 2014년에는 약 8만 명이다. 이는 유럽 국가 중 자국 인구수 대비 가장 많은 수의 난민 신청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스칸센과 티볼리 놀이공원을 다녀오는 길에 본 그 모자(母子)도 난민이었을까?
그들을 본 날은 스톡홀름의 절대 반지, 들고만 있으면 어떤 교통비도, 어떤 입장료도 두렵지 않은 스톡홀름 카드를 들고 스칸센과 티볼리 놀이공원을 누리고 온 날이었다. 스칸센의 동물원, 아쿠아리움, 민속촌을 돌아다니는 왕군은 물 만난 고기가 되었다. 나는 스칸센이 조금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왕군은 ‘이번 여행에서 제일 신이 난다!’고 들떴다. 스칸센을 둘러보고 길 건너 티볼리로 간다. 스톡홀름 카드로 무료입장이니 들어가기나 해 볼까 했는데, 티볼리는 천국이다! 여기는 신나는 놀이기구가 정말 많다! 아, 스웨덴 사람들은 이렇게 스릴 있는 놀이기구를 타는구나. 프라하에서 스카이다이빙을 못한 아쉬움을 날려줄 만큼 자유낙하를 경험시켜주는 놀이기구들도 즐기고(놀이기구 의자가 너무 높아서 나 혼자서는 타고 내릴 수 없던 것은 비밀이다.) 길가에 즐비한 사행성 게임들 구경도 하고(북유럽 사람들은 대자연과 하나 되어 생활할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사행성 게임의 인기가 엄청나다.) 야외무대에서 하는 스웨덴 음악프로그램 공개방송도 구경했다.(촌스럽다. 한류가 인기 있는 이유를 알겠다.) 그렇게 하루를 즐기고 숙소로 가는 길에 그들을 보았다.
불이 꺼진 백화점 앞은 노숙자들의 침실이 된다. 중년의 집시 여자 몇 명이 깔고 누운 신문지 위로 젊은 백인 청년이 신발을 벗고 자리를 잡는다. 청년은 노숙이 아직 부끄러운 듯 주위를 살핀다. 집시 여인은 청년이 벗은 신발을 소중히 받아 조심스럽게 먼지를 턴다. 엄마만이 보일 수 있는 눈빛과 손놀림이다. 집시 여인과 백인 청년, 저들의 사연을 무엇일까? 집시여인이 살아온 삶이, 아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가 애달프게 다가온다.
스톡홀름은 정말이지 마음에 든다. 물가가 터무니없이 비쌀까 싶어 걱정한 데에 비하면 물가도 견딜만하다. Jensen’s B∅fhus 같은 체인 스테이크 레스토랑이나 MAX같은 스웨덴산 패스트푸드 체인, 백화점 지하의 푸드코트를 이용하면 식사비용의 부담도 덜 수 있고, Coop같은 현지 슈퍼마켓에서는 디저트까지 괜찮은 비용으로 살 수 있다. 옷이나 악세사리도 한국의 시내 물가만큼 지불하면 살 수 있다. 일요일에 열리는 회토리예트 벼룩시장에서는 그야말로 ‘득템’도 할 수 있다.
시청사를 활짝 개방하는 것도 마음에 든다. 약간의 입장료를 내거나 스톡홀름 카드를 제시해야 하긴 하지만 노벨상 수상자들이 모이는 그 블루홀에 입장하는 대가로는 저렴하다. 스톡홀름 시청에서는 매년 12월에 노벨상 시상식과 축하 만찬이 열린다. 붉은 벽돌로 지은 블루홀이 바로 그 장소이다. 블루홀은 벽면은 붉은 벽돌, 천장은 유리로 되어있다. 건축 당시에 이탈리아의 판테온처럼 천장을 뚫으려 했으나 이탈리아와는 많이 다른 스웨덴 날씨 탓에 천장을 유리로 막았다. 블루홀은 생각보다 작다. 미디어에 제공하는 사진은 와이드 앵글로 찍어서 실제보다 크게 보이게 했을 뿐이라고 한다. 노벨상 시상식 때에는 그 작은 공간에 노벨상 수상자와 가족, 스웨덴 왕가, 학술회 관계자, 방청 응모에 당첨된 대학생 등 1000명 이상의 사람이 모인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개인당 60cm의 공간만이 주어진다. 물론 노벨상 수상자들에게는 특혜가 있다. 그들은 개인당 80cm의 공간을 가질 수 있다. 시상식 후에는 블루홀 위의 골든홀에서 무도회를 연다. 골든홀은 이름 그대로 1900만 개의 금박 모자이크로 벽면이 가득 채워져 있다. 블루홀 위에 골든홀, 골든홀의 위는? 부엌이다. 노벨상 축하 만찬에 제공할 요리들을 재빠르게 만들고, 210명의 웨이터가 이를 3분 안에 서빙하는 격동의 주방이다.
스웨덴 사람들의 친절함도 마음에 든다. 카타리나 전망대에 올라가려는데, 분명 전망대는 눈 앞에 있는데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공사 중이고 계단은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는 아저씨들에게 물어보니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설명대로 가도 없다. 틀린 길이다. 다시 지나가는 청년에게 물어보니 친절히 설명해주다가 “됐어. 그냥 나 따라와.” 한다. “넌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잖아. 너 친절하다. 고마워.”하니 “일주일에 몇 번씩 있는 일이야.” 한다. 북유럽을 오기 전에는 차가운 분위기의 잘생긴 북유럽 엘프를 상상했다. 실제로 와보니 북유럽 엘프가 안 보이는 것은 아쉽지만, 차가운 사람도 없는 듯하다.
가이드북에서 보던 감라스탄 전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싶었는데, 바로 시청 전망대였다. 당일 예약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데 시간대별 마감이 빠른 편이므로 오전 중 예약하는 것이 좋다. 시청 전망대 탑 예약 시각을 기다리며 앉아있는데, 지나가던 한국인 여행객이 묻는다.
“자네는 어쩌다가 북유럽까지 왔는가?”
왕군이 답한다.
“북유럽이 여행의 끝판왕이니까요.”
우문우답이다.
하지만 어쩌다가든 저쩌다가든 북유럽에 다시 올 날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속에 참 오래 남는 곳이다.
+ 스톡홀름에 다시 갈 날을 위하여, 만족했던 숙소
raddison blu royal viking - 중앙역에서 바로 연결/ 감라스탄, 옌센스 뵈프 하우스 등과 가까워서 위치 굿. 호텔 시설도 갠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