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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요정 김혜준 Nov 25. 2021

그 사람과 커피

가장 쌉싸름하고 설레는 한잔


아이폰의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용량의 압박으로 지워버리는 사진들 속에서 꿋꿋하게 몇 년씩 살아남는 사진들이 있다.  그 사진 한두 장이 무어라고 쉽게 지우지 못하는가 싶지만 막상 이 사진이 없어지면 잠시나마 그 시간들이 불러오는 너무나 행복하고 설레었던 어색함들 마저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연애인지 썸인지 우정인지 동료애인지 비지니스 관계인지 모를 오래된 그와 나의 시간들에는 다양한 나라에서의 만남도 있었고 그의 일터, 나의 집, 내가 자주 가는 단골 카페, 그가 자주 가는 단골 카페, 그의 동네, 나의 동네… 그리고 먼 여행지 등 카테고리로 일괄 정리할 수 없는 자유로운 움직임들이 있다.


성향도 상당히 다른 편이라(결과적으로는 조금씩 융화되는 기분이 들지만) 메신저의 대화 내용도 맥락 없는 주제와 음악, 일에 관련된 이슈, 단순한 일상 등 달콤함과는 거리가 있는, 두서없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그와 함께한 시간들 중에 음식과 관련된 추억이 무엇이 있을까 떠올려보았다. 내가 해 준 요리, 그가 해 준 요리, 남이 해 준 요리보다 만나면 함께 꼭 마시는 새카만 커피 한 잔이 그렇게도 강렬하게 남아 있더라.


이십 대, 삼십 대에 하던 연애가 가진 톤과 향기가 다른 것처럼 사십 대에 들어서기 직전부터 지금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는 나의 감정선은 만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 기본적으로 나는 굉장히 감성적인 사고를 기조에 깔고 있는 사람이고 그는 얄미울 정도로 고저가 없는 차가운 이성으로 똘똘 뭉쳐진, 나와 상반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마흔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무렵 진지하게 그에게 물었다.

“과연 인생에서 ‘마흔’이라는 나이, 해가 주는 자극이라는 게 당신에게 있었던가? 두렵지는 않았나?”


나보다 몇 해 앞서 살아온 그는 여느 때처럼

“나이를 세는 숫자가 아닌, 지금 네가 살아가는 일상이 그리고 일이 만들어 내는 시간을 믿어. 그러면 너의 불안함은 점점 옅어질 거야.”라고 말했다.


화려한 명품보다 환경을 위한 움직임의 의미가 담긴 옷과 신발을 구매하고 마켓 서칭과 인맥 잔치를 위한 다이닝 투어를 즐기기보다는 작은 테마를 잡고 그에 맞는 루트를 짜서 혼자 또는 단둘이 떠나는 여행을 선호하게 된 것도 그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의 켜를 차곡차곡 쌓을 수 있도록 조용히 옆에서 지켜봐 주고 쓴소리를 더 많이 하는 역할을 해 주고 있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점점 변화해간다는 것.

감사하고도 놀라운 경험이 아닐까 싶다.




몇 년 전 핼러윈 즈음의 어느 날 오전.

우리 둘에게 무척 소중한 쇼조 커피에서의 라테 그리고 내 사랑 카페오레. 삐아프의 핼러윈 초콜릿을 선물했었다. 유난하게 달콤한 것들을 사랑하는 그의 취향을 너무나 좋아한다.



쇼조 커피의 아이스 카페오레를 마시는 순간만큼은

나의 출장 일정에 주어지는 부스터가 되는 기분이다.

아마 이 날이 처음으로 작은 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던 터라 수줍음과 설렘이 아직도 느껴진다. 이때의 차가운 공기와 반짝이는 아침햇살도.


예전에 지방으로 이동하는 길에 들른 휴게소 안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메뉴를 고르다가 “맛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없을 것 같아.”라고 투정을 부리는 내게 “그럴 땐 웬만하면 라테를 고르면 돼. 중간 이상은 하게 되거든.” 이란 우문현답을 건네던 그가 떠오른다.


커피에 너무나 진심이지만

유난스레 행동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





그렇게 같이 마신 커피도, 시간도 늘어나게 된

어느 날 가을의 coffee break.


야외 테라스에서 한 시간여를 떠들어도 추운 줄 모르고

까만 커피가 비어 가는 것이 아쉬웠던 오후.


바쁜 서로의 시간 사이에 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커피의 힘도, 핑계도, 표현도 신기하기만 했다.


그 많은 진수성찬, 산해진미들 보다 먼저 생각나는 게 이 한 잔의 커피라니… 아이러니 하지만 아마도 제일 솔직하고 본질적인 아이템이 아닐까 싶다. 내게 커피 같은 사람.



지금 가장 생각나는 것은  사람이 직접 내려주는 커피.

얼른 다시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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