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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장에 찔레꽃, 봄

아버지의 담장을 추억하며

by 나무다



송이는 측백나무 앞에서 까치발을 하고 서 있습니다. 목을 있는 대로 늘여 보아도 겨우 아랫집 지붕만 보일 뿐입니다. 폴짝폴짝 뛰어오르기도 해 봅니다.

봄빛이 나기 시작한 지 채 며칠이 되지 않아 들쑥날쑥, 쑥쑥 자라 오른 새 가지들을 엊그제 아버지께서 가지런히 잘라내시며 측백나무의 키를 낮추어 주셨지만 여전히 송이의 키보다는 크답니다.


송이는 지금 그 녀석이 일어났는지 궁금한 것입니다.


송이네 집은 이웃의 다른 집들보다 좀 더 높습니다. 자그마한 언덕 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송이네 아버지께서 하나하나 쌓으신 돌축대 위로 측백나무와 탱자나무가 울타리 노릇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송이는 해 질 녘이면 수돗가 근처 울타리에서 마을 쪽을 바라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작년 말에 얻어 오신 달력의 그림과 똑같은 풍경이 마을 건너 먼 하늘에서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측백나무의 풋풋한 향기가 묻어나는 상쾌한 아침입니다. 어머니는 밤새 할머니께서 사용하신 요강을 거름자리에다 비우고 수돗가 근처로 오십니다.

"송이야. 할머니 이부자리 정리 좀 도와 드리겠니? "

하지만, 송이는 그 녀석이 보고 싶은 마음에 못 들은 체 흘려버립니다.


쪼그리고 앉아서, 잎이 듬성듬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머리를 바짝 대어 봅니다. 아랫집에 쌓여있는 짚더미 너머, 얼핏 녀석의 귀가 보이는 듯합니다. 송이는 숨을 죽이고 눈을 더 크게 떴습니다. 마침 짚더미 하나가 쓰러지더니, 이내 녀석이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송이가 있는 쪽을 봅니다. 녀석의 그 큰 눈이랑 마주치는 순간, 송이는 숨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벌떡 일어나 후다닥 달려갑니다.


와장창 창! 놀라서 빨리 도망가고 싶었을 뿐인데,

어머니께서 씻어 엎어놓은 할머니의 요강을 발로 차고 말았습니다. 송이의 발차기 한방에 속절없이 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시던 어머니께서 달려 나오십니다. “어머나, 송이야! 다친 곳은 없니?" 순식간에 달려오신 어머니께서 송이의 손과 발을 살피십니다. “우리 송이가 무슨 생각을 하다가 보지 못했을까? 조심해야지." 송이의 놀란 눈을 들여다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엄마, 죄송해요. 할머니 이부자리는 송이가 정리할게요" 어머니께서 송이의 머리를 쓸어 주셨지만, 송이의 가슴은 아직도 콩닥거립니다. 송이를 바라보던 그 녀석의 큰 눈 때문입니다.


며칠 전 어머니를 따라 아랫마을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비석거리를 지나 막 마을 우물을 돌아서는데, 엄청나게 큰 무엇인가가 송이와 어머니 곁을 휙 하고 달려 지나갔습니다. 어찌나 크고 빠른지 송이는 매일밤 할머니의 옛이야기 속에서 나오던

바로 그 늑대가 나타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머리가 쭈뼛 쭈뼛 서고, 심장은 할머니의 다듬이질 소리처럼 빨리 뛰었습니다. 어머니 곁에 빠짝 달라붙었습니다.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뒤를 돌아보았더니, 그 녀석은 저기 만큼 달려가 골목 끝에 가 서 있었습니다. 송이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걸까요? 휙 다시 방향을 바꾸더니 이내 송이 쪽으로 곤두박질쳐 왔습니다.


“엄마야~!!" 송이가 소리를 지르며 어머니의 뒤로 숨고는,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별 놀라는 기색이 없으셨습니다. 송이를 품에 안아 올려 주시거나 도망가실 생각을 전혀 안 하시니 말입니다. “송이야, 괜찮아! 아랫집에 새로 가족이 된 송아지란다. 송아지도 우리 동네에서 살게 된 것이 기쁜모양이구나.” 하시며 담장 쪽으로 살짝 물러나 주시기만 하셨습니다. 송이는 어머니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에 자동차 한 대가 우리 마을까지 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어머니와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자동차가 골목길을 돌아 들어오는 모습을 보시자, 어머니는 마치 괴물이라도 만난 듯이 소스라치게 놀라시면서 송이를 번쩍 안아 올려 꼭 안으셨습니다. 그리고 자동차 근처에는 절대 가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자동차보다 더 무서워 보이는 송아지라는 놈에게는 예쁘게 웃어주시기까지 하시니 말입니다! 쏜살같이 달려오던 송아지는 어머니와 송이가 있는 공터까지 달려와서 먼지를 일으키면서 멈추어 섰습니다. 그러더니, 이리저리 뜀박질을 하는 모양이 정말 신이 나서 춤이라도 추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그 모습을 웃으면서 바라보시다가 송이의 손을 꼭 잡아 주셨습니다. 하지만, 송이는 당장이라도 송아지가 달려들 것만 같아 여전히 두렵기만 했습니다. 송이의 그런 마음은 아랑곳없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면서 노는 그 녀석이 얄밉기까지 했습니다. 그날부터 아랫집 송아지는 송이의 적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신경이 쓰여서 집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송이가 생쥐가 되었다가 고양이가 되었다가 합니다. 생쥐처럼 담장밑을 졸졸 따라가다가는 도둑고양이처럼 까치발을 하고 살금살금 걸어가니 말입니다. 아랫집 외양간이 이렇게 멀게 느껴진 적이 없었습니다. 다가가면 갈수록 되돌아 도망쳐 와야 하는 길이 멀어지니 불안하기만 합니다. 다시 돌아갈지 말지를 백번정도 망설인 끝에 드디어 외양간에 닿았습니다. 송이는 외양간 쪽 벽에다 귀를 갖다 대었습니다. 봄볕에 덥혀진 흙 담벼락이 따뜻합니다. 벽 이곳저곳에 난 작은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봅니다. 외양간 속은 아무런 기척이 없습니다. 조금 싱거워진 송이가 뚜벅뚜벅 집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다그닥 다그닥! 우물이 보이는 골목 끝에서부터 정신없이 달려오고 있는 녀석은 틀림없는 그 녀석입니다. 송이는 너무 놀라 온몸에 기운이 다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겨우 몇 걸음 달려가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녀석의 발자국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려옵니다. 송이는 귀를 막고 엎드린 채 생각했습니다. “하느님, 제발 도와주세요. 이제부터 정말 착한 송이가 되겠습니다.”송이는 눈을 꼭 감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까요? 먼지를 일으키면서 송이를 지나친 송아지가 조용해졌습니다. 송이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 녀석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송이네 돌담사이로 막 피어오른 찔레꽃잎에 코끝을 문지르고 있습니다. 쏴한 찔레꽃잎 냄새라도 맡고 있는 걸까요? 자세히 보니 송아지의 얼굴이 돌쟁이 아가 얼굴을 닮았습니다.


송아지의 크고 검은 눈동자 속에 이제 송이의 미소가 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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