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가 '글'을 넘어설 수는 없다!

by 라온제나

친구들이 오랜만에 집에 놀러왔다.

수만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주요 화두는 늘 아이들이었다.


이제 곧 중학생이 되는 아들을 둔 친구!

아이와 요즘 여러 가지 문제로 갈등이 심해 고민이 깊단다.

중학교 시험, 성적, 수행평가...

이런저런 얘기 끝에 아이가 글씨를 너무 못써 잔소리를 하는데도 고쳐지질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잔소리를 하고 연습을 시키는데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면서!

친구의 모든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또한 내 이야기다.


중학생이 되면 수행평가의 특성상 아무래도 글씨의 중요성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지필평가와 아울러 성적과 직결되는 것이니!

반에 과학고 입학을 염두에 둔 머리 좋은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지필평가 점수는 단연 최고였으나 수행평가를 보는데 도무지 읽을 수가 없을 만큼 답지 글씨가 악필이다.

나름 애를 쓰고 추측해서 읽어보려 하지만 가독성이 떨어지는 답지는 결국 객관적 측면에서 냉정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의미와 의도까지 확장하고 추측해 평가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읽어내기 어려운 학생의 답안지에 이같은 정성을 기울여주는 것이 때론 객관성과 공정성의 문제를 낳을 수 있으니 말이다.


문자는 엄연히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도구적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런데 내가 전달한 문자를 상대방이 해독할 수 없다면?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 같은 문자라면?

당연히 그러한 문자는 도구적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셈이다.

답지에 아이의 수준높은 지적 이야기들이 넘쳐나도 이를 해석해 내기 어렵다면 이보다 안타까운 상황이 어디 있겠는가!


혼자만의 일기가 아닌 이상 글은 일단 누군가 읽어주어야 의미가 있는 법이다.

그 아이에게도 '글씨'라는 것이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지만 왜 충실해야 하는지에 대해 충분히 설명해 주었고,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무사히 과학고에 입학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글씨는 컴퓨터 폰트처럼 너무도 예쁘고 반듯하지만 글의 내용상 빈약한 경우도 있는 법이니까!


내 아이에게도 이런 아이러니한 입장을 동시에 투영하게 된다.

아이의 단정하지 않은 글씨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연습만 충분히 한다면 얼마든지 잘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렇기에 바짝 연습을 시키면 '그까짓 거' 식은 죽 먹기라 생각했다.

중요한 건 글의 '내용'이지 글씨라는 '형식'이 아니라는 거!

그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어렸을 때 초등학교 입학 후부터 꾸준히 글씨 연습을 하곤 하던 우리 세대와 지금 아이들 세대는 분명 다르다.

노트 필기를 대신하는 다양한 형태와 방식이 존재하고, 글씨 연습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필요와 효율성 면에서 크게 떨어질 뿐더러 의미없는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엄마들은 생각한다.

일단은 가장 보편 타당한 무기는 갖춰야 한다고!

글씨를 못 써서 손해보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느냐고!


아이는 이제 자신의 노트를 내게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글씨를 바로잡아 주려는 엄마의 작고 헛된 희망이 결국 벽을 만든 모양이다.

'글' 속에 담긴 아이의 생각을 읽어주고픈 엄마의 뒤늦은 바람은 '글씨'에 발목이 잡힌 셈이다.

실수가 명백하다.


글씨가 아무리 중요하다 한들 글 자체를 넘어설 수는 없는 법이다.

집이 예쁘다고 해서 그 가족의 행복을 담보할 수는 없는 것처럼...

글은 본질이요 글씨는 현상이다.

본질과 현상을 호도하지 않아야 했다.

연습하면 금방 좋아질 것 같다는 작은 착각과 기대 속 큰 것을 놓칠 수 있음을 명심하자!


더불어 친구와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아이가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님을 기억하자고!


모든 동물 중 '자아'가 있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바라볼 수 있는 존재라고 한다.

분명 아이가 스스로 보고 느끼고 발전하는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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