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과 석류>
대구에는 우리나라에 흔하지 않은 꽃이 있다. 나는 어린 시절을 쭉 중부지방에서 자랐으므로 내 머릿속에는 이 꽃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유럽에 살면서 인근의 나라들을 여행할 때 우연히 보게 된 꽃이었다. 아름다운 해안에 파란 지붕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그리스 로도스섬. 곳곳에 펼쳐진 파란색 물결 가운데 정열적인 오렌지색이라서 그런지 훨씬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 꽃과의 첫 대면은, 정말이지 너무나 정열적인 색감에 놀라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신비롭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Yves Klein의 ‘울트라 블루’는 그냥 블루보다 더 강렬한 블루를 품으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강인한 ‘울트라한’ 블루라 그렇게 쓸 수밖에 없다. 그런 것처럼, 석류꽃이 품고 있는 이 오렌지색은 그야말로 빠씨옹passion(이건 불어 발음 그대로, 외국어 표기법도 살짝 벗어나서 써야 느낌이 나는 것 같다) 오렌지 같은 느낌이다. 내게 만약 색깔에 이름을 붙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아마도 석류꽃의 오렌지색을 ‘빠씨옹 오렌지’라 부를 것이다. 그야말로 이름 그대로 강렬한 생명력을 품고 있는 듯한 색깔이다. 생명을 품은 여인의 자태이기도 하고, 생명을 유혹하는 듯한 강렬한 빛깔이기도 한 그 빠씨옹한 오렌지에 매료되고 만다.
로도스 섬의 그 빠씨옹 오렌지에 빠져서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파란 대문집 너머의 어떤 풍성한 부인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빠흐동(실례합니다)”이 입 밖으로 툭 나왔다. 남의 집 담 너머로 핀 꽃을 훔쳐보는 것이니 실례한 것도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인은 전혀 실례가 안 된 듯한 너그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프랑스어를 하냐고 물었고, 나는 프랑스에서 살고 있고 지금 그리스를 여행 중이라 대답했다.
부인은 불어를 할 줄 알았다. 그리고, 석류꽃이 너무 예쁘다며 바라보던 나에게 석류는 그리스에서 대단히 중요한 과일이라며 석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스에는 결혼할 때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치마폭에 던져주는 과일이라고 했다. 그 속에 가득 담겨있는 씨앗처럼, 자손을 풍요롭게 하는 다산의 의미로 석류를 던져준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비슷한 의미로 대추를 던져준다고 했더니 굉장히 흥미로워했다.
이 스토리가 나와 석류의 첫 만남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석류꽃에 대한 환상이 언제나 머릿속에 있었고, 그 아름답던 빛깔이 잊히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대구로 이주하면서 동네 곳곳에 내가 아는 빠씨옹 오렌지색이 곳곳의 나무에서 보이는 것이 아닌가? 가까이 가서 보니 세상에나!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그 석류꽃이 아닌가!
석류꽃을 좋아하게 되면서 언젠가 석류에 대한 그리스 신화를 알게 되었다. 풍요와 수확의 여신인 데메테르는 딸 페르세포네를 정말 사랑하는 엄마였다. 페르세포네는 너무나 아름답고 젊은 아가씨였다. 그 아름다움에 반해 어느 날 지하의 왕인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해서 지하세계로 데려갔다. 페르세포네가 경험한 지하 세계는 생각보다 암울하지 않았지만, 엄마 곁을 떠나서 살아야 한다는 슬픔이 있었다. 납치된 딸을 찾아 헤매느라 대지의 신이기도 한 엄마 데메테르는 땅을 돌보지 않았고, 그러자 대지는 메말랐고 곡식은 죽어갔다. 이를 보다가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남편 제우스는 지하의 신에게 딸 페르세포네를 지상으로 돌려보내라고 명령한다.
금지된 석류 여섯 알을 먹은 페르세포네는 지하 세계의 음식을 먹은 자는 지상으로 갈 수 없는 법 때문에 걱정을 한다. 결국 딸은 엄마에게로 돌아왔지만, 제우스와 하데스는 타협점을 찾는다. 그게 바로 1년 중 3분의 2는 엄마와 지상의 세계에 살고 나머지 3분의 1은 지하에서 여왕으로 지내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는 사계절이 생겨났다고 한다. 대지의 신인 데메테르가 딸이 없는 동안 슬픔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때가 늦가을부터 겨울까지의 암울한 시기이며, 딸이 다시 돌아오는 시기인 봄이 바로 딸 페르세포네가 지상으로 돌아온 시기라고 한다.
이렇게 계절이 생기고, 우리 인간은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과 이별을 이 신화를 통해 깨치게 된 거라고 한다. 석류꽃의 이미지는 가령 배꽃의 흰색이 지닌 절제의 미학은 아니다. 석류꽃이 지닌 ‘빠씨옹 오렌지’의 농염함은 분명 메리메Prosper Mérimée의 소설에 나오는 카르멘을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의 순환, 그리고 풍요와 다산, 아름다운 사랑과 삶의 이야기. 모든 것들을 품고 있는 석류꽃이 계절의 정열을 불태우는 대구. 그래서 나는 대구가 더욱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