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 continue encore...>
1.
이 집으로 이사를 온 뒤, 집을 뒤덮고 있던 커다란 느티나무를 싹둑 잘랐다. 그렇게 결정하고서도 벼르고 벼른 끝이었는데, 이상하리만큼 나무는 쉽게 잘리지가 않았다. 건장한 3~40대 청년 서너 명이 붙어서 전기톱을 동원한 것이었으나 나무는 끄떡도 없었다. 이어서 절반쯤 잘려진 나무를 커다란 트럭을 동원해 충격을 주었는데도 나무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무는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나무 한그루와 씨름하여 겨우 마무리하였다.
잘려진 나무는 여러 사람이 넉넉히 앉도록 통나무의자 여럿으로 다시 잘라두었고, 나무밑동은 그대로 두었다. 마당의 따뜻한 공기와 산 쪽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섞여 살랑거리는 햇살 좋은 어느 오후, 지인들과 함께 밑동 잘린 이 나무를 중심으로 통나무의자에 빼앵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거야. 그러면 나무는 영원히 나와 이 집과 함께 할 것이고. 내 머릿속 상상의 날개는 나무를 잘라버렸다는 죄책감보다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괜찮다는 말을 되뇌며 자기위안을 했다.
나무를 자르고 3개월 하고도 며칠이 지났다. 나의 쉼터의자가 되어줄 것으로 생각했던 나무밑동에서 어느 날 새로운 싹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제법 커다란 가지들을 새롭게 뿜뿜 뽑아내고 있다. 나이테로 보아 나보다 20년은 더 젊은 녀석이 분명했는데, 집을 꿀꺽 삼켜 버릴 만큼 건장한 청년 느티나무였다. 절정의 생명력을 지닌 때인 녀석은 쉽사리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대로 다시 녀석을 키워볼 생각이다. 어차피 세상은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니 순리대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2.
우리 집에 새로운 식구가 들어왔었다. 어디서 딸려온 것인지 내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달팽이 녀석 한 마리가 주방의 개수대를 산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녀석이 좋아하는 당근과 샐러드 잎을 넣어주고 녀석이 좋아하는 풀들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세상 전부를 자신의 터전이라 여겼던지, 그 좁은 공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열심히 주는 먹이 받아먹으며 잘 지내는 듯하다가, 몇 번의 탈출을 시도하더니 끝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공기창만 조그마하게 열어두고 뚜껑을 덮어두었는데, 어디로 나갔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소설 <빠삐용>에서 주인공 앙리 사리에르(Henri Charriere)가 지하 굴을 음악소리와 함께 매일 조금씩 파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녀석은 어쩌면 좀 더 난이도가 있는 곳이었더라도 앙리처럼 그렇게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하루하루 체력을 키워가며 탈출을 시도하여 마침내는 성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언젠가는 탈출에 성공하고야 말 그 녀석을 덜 힘들게 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쉽게 탈출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 것이 차라리 나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잘 살아주었으면 고마웠을 텐데, 오늘 우연히 주방에서 딱딱하게 바싹 말라붙어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그 녀석을 발견했다. 잠시 생각했다. 바깥 풀숲 어딘가에서 실은 생사부지이겠지만 그래도 영원히 살리라는 막연한 믿음 하나로 녀석을 살려두는 것이 현명했는지, 아니면 녀석을 발견한 책임감이 있으니 탈출하지 못하도록 꼭 가두어 살렸어야 했는지. 그것도 아니면 일정한 틈을 열어두어 녀석과 나의 인연과 운명을 하늘에 맡겨 이치대로 살다가 이렇게 녀석의 딱딱한 껍질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후회하는 것이 맞는지.
질문 하나.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라면 어땠을 것 같은가?
3.
언젠가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가 먼저 떠나고 누가 늦게 떠난다는 그 단순한 사실을 애도한다. 내가 만들어준 달팽이집에서 내가 원하는 그 세월만큼은 분명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달팽이가 탈출하여 조금 더 일찍 죽었다는 사실이 나에게 엄청난 슬픔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달팽이의 그 생명력에 대한 잠시의 슬픔 정도였다. 달팽이는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나와 깊은 추억을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빠삐용>의 앙리도 언젠가는 죽었을 것이다. 감옥에서 그냥 편안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 큰 절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왕 두 개의 갈림길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선택한다고 하면 나는 어땠을까? 나의 선택이 비록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지라도, 나 역시 그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나의 눈앞에 저 넓은 세상이 펼쳐진다면, 나는 그 한 가운데 내가 원하는 그 속으로 첨벙 뛰어들 것이다. 생명이란 그저 살아있다고 진정 살아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차마 떠나보낼 수 없는 사람이 있고, 또 떠나는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그냥 조용히 떠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죽음의 형태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다가온다. .
이 사진은 빠리의 나의 갤러리가 위치한 뽕삐두센터 앞에 매일 저렇게 나타나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주는 노인이 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싫어했다. 노숙자라 별로 가진것도 없는 그의 살림은 마켓에서 훔쳐 온 샤리오에 본인의 사계절 옷가지들과 먹을 것들을 가지고 다닌다. 난 그가 하는 행동을 자주 지켜봤다.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날카로운 눈빛을 한 그는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줄 때만은 이상하게도 부드러운 눈빛으로 변했다. 세월이 이만큼 지났으니 그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는 비둘기로 환생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