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기록이 삶을 안아주는 방식.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해야 했다.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잘 살아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텼다.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공부’였다. 그것이 내 감정을 붙잡아주는 유일한 도구였고, 살아 있다는 느낌을 잊지 않게 해주는 언어였다.
술도 마셔보았다. 못 마시는 소주 한 병에 속이 뒤집혀 구토를 하고, 몸을 혹사시키며 토해내고 나면 내 몸 속 저 끝에 응어리처럼 뭉쳐 있는 아픔덩이들을 내보낼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아픔덩이들은 어떤 방법을 써도 나오지 않았다. 노래방에 가서 실컷 소리 질러 노래를 부르면 쏟아져 나올까. 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고, 산 정상 언덕 위 벼랑 끝에서 소리를 질러보면 터질 수 있을까. 온갖 방법을 다 해보았지만, 내 속에 자리한 그 아픔의 응어리는 좀처럼 빠져나오지 않았다. 몸은 더 지쳤고, 머리는 더 무거워졌다. 내가 간밤에 토해낸 것은 아픔덩이가 아니라, 감당하지 못하는 고통이 만들어낸 방황덩이들뿐이었다.
나는 이제 스무 살 청년도 아니고, 어른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이 무거운 오십대 중반의 여성이다. 어느덧 나는 기뻐도 웃음을 삼키고, 슬퍼도 마음껏 울 수 없는 자리에 와 있었다. 오히려 괜찮은 척, 다 괜찮다고 말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법만 익숙해졌다. 남들이 보기엔 단단하고 성숙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겉모습 안에서 나는 늘 불완전했고, 늘 허기졌으며, 늘 그늘이 졌다.
아들에게 나의 불안함을 보일 수 없었다. 감정의 폭풍이 나를 덮칠 때마다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엄마가 흔들리면 안 돼. 나 하나 무너지면, 우리 모두가 무너질 수 있어.” 또 다른 책임, 내 어머니. 장남을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 앞에서 나는 더 이상 ‘딸’일 수 없었다. 어머니의 절망을 붙잡아주는 ‘버팀목’이 되어야 했고, 나는 그저 단단해야만 했다. 마음은 망가졌는데도.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아버지가 떠올랐다.
어느 여름 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겠다고 선포한 날이었다. 당시 나를 말리던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넌 세상에서 가장 큰 성공이 뭔 줄 아느냐? 평범하게 사는 거다. 결혼하고, 자식 낳고, 그 자식 잘 기르며 사는 거. 그게 인생 최고의 성공이야.” 그날 밤, 아버지는 술에 취해 방 안에 누워 잠든 듯했지만, 돌아누운 어깨가 들썩였다. 나는 그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한다. 남자라는 이유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끝끝내 표현하지 못했던 슬픔과 고독이 그 밤에 봇물처럼 터져 나왔던 것이다. 나는 그 순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 아버지의 그 고독을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단지 딸이 아니라, 아버지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한 사람으로.
그래서였을까. 나는 유학 시절에도 연애 한 번, 소문 한 번 없이 억척스런 유학생활을 했다. 누군가는 “왜 그렇게까지 살아?” 했지만, 나에겐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의 눈물, 어머니의 체념, 가족의 고단한 삶. 그것들이 모두 내 가슴 한편에서 불쑥불쑥 살아 움직이고 있었고, 그 감정들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나는 억척스럽게 공부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부모님께 송금했다. 그건 단순한 돈이 아니었다. ‘저는 살아 있고, 잘 버티고 있어요’라는 마음의 신호이자 안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내던 돈이 점점 처음 나의 의도와는 달리, 나를 우리 가족 사이에서 언제나 ‘당연히 돈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효도란, 사랑이란, 책임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소진시키는 일은 과연 옳은 걸까. 그런 고민은 지금도 내 마음 깊숙이 무겁게 남아 있다. 가족에게 보내는 그 위안의 돈이 내 자신을 얼마나 혹독하게 했었고 고통스럽고 무겁게 했었던가. 그 무거운 책임감을 왜 나는 늘 혼자 감당하려고 했었던가.
지금, 나는 예술을 다시 꺼내 본다. 감정의 끝에서 만난 예술. 내가 오랜 시간 곁에 두고 살았던 이 예술이, 혹시 나처럼 아픈 사람들에게도 작지만 진실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새로운 시도를 시작했다. 고통을 들여다보는 일, 그리고 그 고통을 언어와 이미지로 되살리는 일. 예술은,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고통을 감각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치료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주변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안정적인 교수직이 얼마나 귀한지 아느냐고, 이 나이에 모험은 사치이며 현재 주어진 것을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고. 안정은 참 달콤한 유혹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 유혹보다 더 절실한 간절함이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살기보다는, 나의 삶을 살고 싶다는 그 단단한 열망. 그것은 단지 직업이나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진짜 ‘나’일 수 있을까.
행복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제 안다. 그것은 삶을 내가 선택하고 있다는 확신이다. 흔들리더라도, 쓰러지더라도, 그 선택이 ‘내 것’이라는 감각. 예술을 통해 내가 전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이다. 불완전한 감정, 상처 입은 기억, 혼자서 버텨야 했던 시간들. 그 모든 것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괜찮다’고 말해주는 예술.
나의 엄마는 지금 신경내분비암이라는, 낯설고 고통스러운 병과 싸우고 있다. 장남을 잃은 충격 때문인지, 그녀의 병은 빠르게 퍼졌다. 병실 안에서 고통을 견디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인간이 마지막까지 누릴 수 있는 품위와 위로란 무엇일까.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슬픔과 고통의 한복판에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안아줄 수 있는 예술은 가능할까.
그것이 내가 지금 삶을 걸고 도전하고 있는 이유다. 예술과 뇌과학의 융합,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치유할 수 있는 시스템. 나는 그 일을 하려 한다. 이것이 내가 다시 글을 쓰고, 다시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 감정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은 이유다.
나는 아직 괜찮지 않다. 그렇기에 쓴다.
당신도 역시 괜찮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는 중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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