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하다. 승진에서 미끄러졌는데 아무렇지도 않다. 사내게시판에 승진자명단이 떴다.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후보자명단에도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작년까지 승진자명단이 공지될 때면 내 마음에는 소용돌이가 몰아쳤었다. 올해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이상하리만치 평온하다.
왜 그럴까? 너 왜 그러니? 나에게 묻는다. 글쎄.. 나도 모르겠어. 전혀 모르겠어? 응.. 내가 득도했나?.. 해탈했나?.. 나 왜 아무렇지도 않지?
승진자명단 인물 중 아는 사람이 없다. 동기들은 모두 승진해서 이미 나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있다. 그동안 동기들이 하나 둘 승진자명단에 포함되고 있을 때 나는 계속 제외되고 있어서 자존심이 상했었다. 그런데 동기들이 모두 승진해서 더 이상 명단에 등장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제는 후배들이 그 명단을 차지하고 있다. 어느 정도로 나보다 늦게 입사한 후배인지 알지 못하니 타격감이 없나 보다. 이런 상황을 슬프다 해야 할지. 내 정신 건강에 이로우니 다행이다 해야 할지.
나는 평소 승진에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욕심도 없었다. 언보싱 기사를 읽으며, 나 같은 사람 많네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면서도 매번 승진자 명단이 뜨면 자존심이 상했었는데, 올해는 그렇지가 않으니 내가 정말 비정상인가 싶기도 했다. 승진자명단을 바라보는 순간 감정이 평온하다 하여 그 후에도 쭈욱 아무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조직은 수직상하구조이다. 올해는 동기가 상사지만, 내년은 후배가 상사로 등장할 것이다. 동기상사와 같은 팀에서 근무하며 마음고생을 하고 있고, 후배가 상사로 오면 또한 그럴 것이다.
내 마음이 상하는 근원은 무엇일까.
상사가 상사로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 하나.
남들이 나를 무능한 사람으로 바라볼 것 같다는 생각 하나.
상사가 상사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기준에 부합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아서 인정할 수 없을 때이다. 관리자로서 갖추어야 할 업무적 인성적 역량을 보유하고 있지 않을 때 그들이 한심했다. 물론 나의 인정, 비인정이 중요하지는 않다. 나의 감정일 뿐이므로. 질투 혹은 열등감에서 비롯된 나의 방어와 반항일 수도 있고.
두 번째 남들이 나를 승진 못하는 무능한 사람으로 바라볼 것이라는 점.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나도 사실 모른다. 그냥 그럴 것 같다는 나의 생각일 뿐이다. 그러니 딱히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이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내가 승진할 확률은 높지 않다. 승진은 업무 능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별도의 알파 능력이 필요하다. 어쩌면 알파 능력이 대부분을 차지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마음의 근육과 마음의 면역력을 키우고 있다. 나만의 방식으로 나를 지키며 살고 있다.
그건 바로, 내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어떤 직위를 차지하고 있는가 보다는 나의 역할을 잘하고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자는 것이다.
조직은 수직상하체계이기 때문에 담당 업무라 해도 100% 내가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담당자인 내가 명확한 기준, 충분한 검토,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결점을 최소화한 상태로 보고하면 관리자도 별다른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겪어왔다. 그래서 나의 업무에 관해서는 내가 대표라는 마음으로 지식을 쌓고 고민을 하며 큰 방향과 세부사항까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토대를 확고히 하는데 중점을 두어왔다.
해야 할 일에 몰두하고, 상사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사무적으로 지낸다. 딱히 그들과 얘기를 주고받고 싶지 않다. 업무적으로 나보다 더 모르는 경우도 많고, 큰 그림으로 바라보는 안목도 없고, 나에게서 전달받은 내용을 본인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 떠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비위가 상할 때가 많았다.
상사와의 관계가 그렇게 사무적이면 승진에서 더 멀어지는 거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보다 무능해 보이는 상사와 나의 승진에 대해 의논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상사는 자신의 앞날에 관심이 있지 나의 승진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무엇보다 그는 나의 승진을 위해 노력할 마음이 하나도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면 이용만 당하는 거 아니냐 할 수도 있다.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데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억울한 거 아니냐고 말이다. 그렇지 않다.
내가 만족할 만큼 일을 해냈을 때 나는 성취감을 느낀다. 목표했던 성과가 나타나고, 외부고객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때 자기 효능감을 느낀다. 내 담당에 대해서 당당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종종 아쉬움은 있다.
수직조직보다 수평조직에서 근무하고 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다음 회차에는 수평조직에 속하기 위해 준비를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