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self) 용서(容恕)

by 전병덕

가을이 깊어 간다.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소슬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은행잎들이 새떼처럼 무리 지어 팔랑대며 내려앉고, 떨어진 은행잎들은 바람결에 휩쓸려 흡사 노랑나비 떼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꼭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는 날, 땅바닥에 부딪쳐 튀어 오르는 물방울을 연상시키는 모양새다. 그 운동장 한가운데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공을 차고 있다. 왜 그랬을까. 문득 시(詩)를 써보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글쓰기의 처음 시작은 수필이었다. 정년퇴직 순년(旬年)을 앞두고 운명처럼 맞닥뜨린 수필 쓰기는 첫 작품이 입선을 하고, 몇 년 새 연이어 수상을 하는 등 나름 자부심을 채워 주더니, 퇴직 후 처음 쓴 장편 소설이 웹소설 공모전에 입상하면서 딴에는 한껏 고무되는 절정도 맛보았다. 시에 대한 관심이 생긴 건 문단 생활 20여 년이 갓 지난 시점이었다. 하여 문예지 등에 실린 시들을 한 번씩 읽어 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곤혹스러운 감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두 번 세 번 거듭 읽어 보아도, 해설을 곁들여 읽어 보아도 난해하기는 거개 마찬가지였다.


얼마간의 시일이 지나자 시나브로 몇 편의 시가 모아졌다. 그렇게 시작된 시 공모전 응모가 햇수로 삼 년째 들어선다. 처음에는 “되면 좋고, 안 돼도 그만”이라는 식의 막연한 관망자 입장에서 ― 그다지 기대치를 두지 않았다 ― 얼추 건성에 가까워 어떤 떨림이나 설렘 등과도 조금 거리가 멀었다. 그랬던 것이 한 해가 가고 두 해째 접어들 무렵부터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점차 한 조각 붉은 마음으로 젖어 들기 시작했다. 눈처럼 쌓인 성심의 결기는 어느새 옹고집이 되어 스스로를 옭아매고, 열혈 청년의 막무가내 집념이 되어 맹목적 짝사랑으로 속절없이 굳어 갔다. 하루하루가 애면글면 거의 가슴앓이 수준에 가까웠다.


두 개의 감정이 시시때때로 충돌을 한다. “지금까지 할 만큼 해 보았다. 그만 쿨(cool)하게 놓아주자. 일흔의 가슴은 더 이상 연분홍이 아닌, 칙칙한 흑갈색의 노욕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생각과 “백 세 시대에 무슨 소리? 괴테(Goethe)는 82세에 파우스트(Faust)를 탈고했고, 피카소(Picasso)도 92세로 생을 마감하는 달포 전까지 그림을 그렸다는데 그에 비하면 난 아직 더운 피가 끓는 이팔(二八)이 아닌가.”하는 웅심의 격돌이었다.


용서를 떠올린 건 바로 그때였다. 어느 날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청했다. “평생을 두고 좌우명으로 행할 만한 글자 하나를 가르쳐 주십시오.”공자는 자공에게 서(恕)라는 글자를 일러주며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于人)”이라는 말을 덧붙여,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견지로 용서를 설명했다. 타인을 염두에 두고 배려하는 지극한 성(誠)의 가슴이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랬다. 타인에게도 이처럼 관대한 용서를 정작 자기에게는 나 몰라라 하고 노심초사(勞心焦思),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매일같이 스스로를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고 있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래, 이제는 그만 나를 놓아주자. 속박과 강박과 억압에서 멋들어지게 자아를 해방시켜 주는 거다.


셀프(self) 용서(容恕)는 과연 어느 선까지 가능한 걸까. 과거와 현재를 종횡무진 넘나들던 용서에 대한 사색은 드디어 2007년 개봉한 전도연(全道嬿) 주연의 영화 ‘밀양’을 소환한다. 아들을 잃고 기독교에 귀의한 전도연은 유괴범을 용서하려고 찾아간 교도소에서 “하나님께 이미 용서를 받았다.”며 아주 편안한 얼굴의 범인을 대하자,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를 할 수 있느냐며 절규를 한다.


下愚不移(하우불이)란 이야기가 논어(論語) 양화 편(陽貨篇)에 나온다. 어느 날 제자들과 길을 가던 공자(孔子)가 길 가장자리에서 똥을 누는 사내를 발견하고 불러오게 하여 짐승에 빗대며 된통 꾸짖었다. 얼마 뒤 이번에는 길 한가운데서 똥을 누는 사내를 만났다. 큰 질타를 예상한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공자는 사내를 피해서 그냥 지나쳤다. 제자들의 질문에 공자는 양심 자체가 없는 자는 구제불능이어서 가르칠 수 없다는 대답을 한다. 용서의 또 다른 맥락이자 한계다.


용서에 대한 기억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2학년 때 나를 제쳐두고 다른 친구와 어울려 납작만두를 먹으러 다닌, 3년 동안 짝이었던 친구를 용서했다. 30대 초반 당시 서민 소형 아파트 반값에 해당하는, 거금의 은행 대출금을 보증인인 내게 떠넘기고 퇴직한 직장 동료를 용서했다. 40대 후반 명절이나 기제사 등 친지들이 모일 때마다, 술에 취해 아무 데나 함부로 침 뱉고 멱살잡이한 사촌 남동생을 용서했다. 50대 중반 승진 심사 때 딴에는 다각도로 신경을 썼음에도, 한껏 도와주지 않았다며 상급자인 나를 모략한 직장 하급자를 용서했다. 여기에서의 용서는 적극적·능동적·유화적 용서가 아닌 소극적·수동적·배타적 용서로 단교를 의미한다. 이후 거의 그들을 만난 적이 없는데 그들 역시 그들 스스로에게 셀프 용서를 했는지 어떤지, 전도연의 관점에서 퍽이나 궁금해진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이 있다. 천성은 쉽사리 바뀌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지난날 몇 명의 지인들을 용서하며 전혀 망설임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방편으로 그들을 블라인드(blind)화하여 일정 기간 동안 객체화시키는 등의 노력도 나름 기울여 보았음이다. 결국 극기로 뜻을 정한 데에는 한 번 배신한 자 또다시 배신을 한다는 철칙과 알게 모르게 공자의 하우불이 고사 등이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모두는 시절 인연의 산물이다. 어떤 계기로 글을 쓰게 되고 또 어느 시점에 이르러 시 공모전에 눈길을 주어, 아등바등 몇 년에 걸쳐 몰입한 데에는 그만한 전생의 인연이 존재할 터였다. 과거의 삶을 일정 기간 관통하며 용서를 주고받은 몇 사람 또한 분명 그러하리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자 만사분이정(萬事分已定)이다. 이제는 오유지족(吾唯知足)의 마음으로 그 어디에도 매몰되지 않고, 온전히 스스로를 위한 삶의 가치와 안식과 자유와 평화를 챙겨볼 때다. 경계의 가을엔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절로 낙엽을 떨구어 내듯이.


조건 없는 용서에 대한 갈망이 깊어진다. 비록 자신에 대한 셀프 용서라도 소극적·수동적·배타적이 아닌 순수의 적극적·능동적·유화적 심상으로의 귀착이다. 그래, 내려놓고 비우는 거다. 적요의 가을날에는 질펀한 유화보다 심플(simple)한 수채화가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상사화인들 어떠랴, 꽃무릇인들 어떠랴. 여전히 별은 빛나고 아직은 초롱한 눈빛 사라지지 않았으니 양단을 유보한 한 발 물러서는 관조다. 어수선한 끌탕은 고이 접겠으나 있는 듯 없는 듯 서성이며 손 모은 단심의 시선마저 거두지는 않겠다. 또 누가 알겠는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장 24절의 말씀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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