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건 퇴고(推敲)를 거듭하는 일이다

by 전병덕

수필 한 편의 퇴고(推敲)를 끝냈다. 살짝 뿌듯해지면서 스스로 대견해지기까지 한다. 정년퇴임 전후 20여 년에 이르는, 적잖은 세월을 함께해 온 글쓰기가 아직 설렘을 동반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껏 두 권의 수필집을 냈고 문학 공모전에서 수필로 세 번, 웹소설로 한차례 최우수상을 수상한 걸 보면 문재가 그리 둔하지는 않은 것 같다.


마지막 퇴고는 언제나 인쇄물이다. 컴퓨터 자판으로 두세 번 정도 퇴고를 마친 다음 프린트해서 들여다보면, 컴퓨터에서는 보이지 않던 탈·오자들이 보란 듯 나타난다. 게다가 수필의 퇴고가 소설에 비해 나름 기준이 엄격한 편이기도 하다. 분량이 짧은 연유기도 하겠으나 되도록 같은 단어를 두 번 사용하지 않고, 단락의 첫 문장은 줄을 넘기지 않으며, 조사 등을 과감히 생략한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장을 지향한다. 솔직하고 순수한 내면의 성찰을 넘어 인격의 도야를 희원하는 것이다.


어떤 쾌감과 상쾌함마저 느껴진다. 퇴고의 전 단계가 커다랗고 울퉁불퉁한 통나무를 과감히 찍어 내고 다듬어, 티 없이 말쑥하고 매끄러운 하나의 기둥을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연상되기 때문이다. 커다란 낫으로 거침없이 껍질을 벗겨 내고, 큰 도끼로 힘차게 옹이를 쳐내며, 대패로 닦아 놓은 면경알처럼 구석구석 마무리 손질을 하는 일련의 절차는 그 얼마나 장쾌하고 명쾌하며 또 호기로운가.


수필은 태생적으로 시나 소설과 색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작심해서 본성을 감추고, 작정하고 본심을 숨기더라도 은연중 작가의 속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여 신변잡기적 타분하고 궁상맞은 모습을 가감 없이 펼쳐 보이는가 하면, 무슨 구도자나 선지자라도 되는 양 진부한 단어와 윤색된 문장으로 자랑만 늘어놓기도 하고, 지극히 순박하고 무구한 심경의 피력으로 가슴을 저리게 하는가 하면, 의연하고 정연한 논조의 설파로 정서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시야를 넓혀주기도 한다.


글쓰기는 필연이었을까. 독서를 좋아했다. 특히 소설을 좋아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 읽은 키플링(Kipling)의 정글북을 시작으로 중학교 1학년 때 황순원(黃順元)의 소나기, 중학교 2학년 때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와 와룡생(臥龍生)의 비호지, 고등학교 2학년 때 읽은 헤르만 헤세(Hesse, Hermann)의 데미안 등이 그중 기억에 남는다. 지금 세대와 판이하게 책이 없어서 못 읽었던 그 시절,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고 반나절을 엉엉 울었고, 전무후무한 비호지의 충격은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잉태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 (irony)하게도 학창 시절 내내 교실 뒤편 게시판 등에 이름을 올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50대 초반 감각적으로 쓴 첫 수필이 공무원 문예대전에 입상을 했다. 그리고 10여 년이 조금 더 지난 후, 처음 쓴 장편 소설이 웹소설 공모전에 당선된다.


나름 수필에 대한 주관도 생겼다. 어쩌면 체계적인 수학을 건너뛴 독단의 글쓰기에서 비롯된 자만(自滿)인지도 알 수 없다. 수필을 사전에서는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로 정의하고 있다. 해서 붓 가는 대로 쓰는 글로 폄론하는 사람도 없지 않으나, 언제나 기승전결(起承轉結)을 바탕에 두었고 단락마다 소주제를 명시하였으며, 남달리 앞치레 뉘앙스(nuance)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등의 노력을 경주한다.


딱히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 퇴직과 더불어 하나둘 줄기 시작한 사교 모임은 알게 모르게 한두 개로 정리된다. 행동반경도 급격하게 좁아져 주일 내내 집에서만 지내는 날들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꽤나 오래전부터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하루는 자못 자연스러웠다. 어쩌면 진즉부터 통나무 기둥을 만드는 연습을 해왔음인지도 모를 일이다. 타자와 일정한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은 새벽 산행 시간이 거의 무이하다. 알게 모르게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 나무들의 군무(群舞)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치 늦가을 찬비를 맞고 일제히 나뭇잎을 떨구어 낸 자작나무숲 정경의 표일함이다.


퇴직 6년 차 새해 벽두를 앞두고 삭발을 감행했다. 정년퇴직과 더불어 줄곧 가슴속에 담아 왔으나 아내의 완곡한 만류로 그럭저럭 지내온 터였다. 탈모증으로 성글어진 정수리 앞부분이 자못 신경에 거슬려, 때로 자신을 초라하고 군색하게 만들곤 했음이다. 말하자면 통나무 껍질과 같은 존재였다. 거울을 보고 앞머리를 밀어 버린 후 주저하는 아내의 손에 억지로 바리캉(bariquand)을 쥐어 주었다. 그렇게 통나무 껍질을 벗겨 내고 까까머리 소년으로 변신한 나는 드디어 바람의 자유를 하나 더 보탰다.


잠자리에서 눈을 뜨면 금방 벌떡 몸을 일으키지 않는다. 똑바로 누워 앞으로 자전거 타기 동작 100회, 뒤로 자전거 타기 동작 100회, 발끝 치기 동작 100회를 연이어 두 번 반복 실시한다. 마지막으로 왼쪽 가슴에 양손을 포개 얹고 두 번씩 읊조리며 다짐을 한다. 따뜻한 가슴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화를 내거나 분노하지 않겠습니다. 분별에서 오는 착각과 허상에서 벗어나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자연의 이치를 따르겠습니다.


첫새벽 산길을 걷는 발걸음이 못내 무겁다. 1여 년 넘게 염두에 두어온 술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는 주탐불욕(酒貪不欲)의 용단이 무색하게, 막걸리를 과음한다는 이유로 엊저녁 아내와 가볍게 말다툼을 한 까닭이다. 와중에 기상 때마다 가슴에 손 얹은 속다짐은 ― 화를 내거나 분노하지 않겠습니다 ― 어디로 잠적해 버렸는지 흔적조차 없다. 시시비비를 오가던 생각은 끝내 자책과 뉘우침으로 이어진다.


빠삐용(Papillon)이라는 영화가 있다. 1973년 개봉된 미국·프랑스 영화로, 결백을 주장하는 빠삐용에게 “인생을 낭비한 죄로 너를 고발하노라.”라는 목소리가 배경 음악 사이로 흘러나온다. 이립(而立)에서 이순(耳順)까지의 시간, 후회는 없다. 나름 열심히 잘 살아왔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나 한 가지 회한으로 남는 게 있다. 문득문득 찾아드는 빠삐용의‘인생을 낭비한 죄’가 정녕 그것이다. 삶을 관통한 무게가 주어진 역량에 비례하지 못했다는 참회와 자괴감 때문이기도 하다.


종심(從心)을 하루 앞두고 있다. 발길 따라 초연하게 깊어진 상념은 언뜻 하나의 화두를 만들어 낸다. 어느 경우에도 조급해하거나 허둥대지 않을 것이며 쑥스러워하거나 겸연쩍어하지 않겠습니다. 곁눈질로 훔쳐보거나 식탐을 부리지 않을 것이며 곁불을 쬐거나 개헤엄은 절대로 치지 않겠습니다.


산마루를 지나 내리막길에서 문득 물소리를 듣는다. 돌 틈 사이를 흐르는 청량한 물소리가 홀연 가슴속을 파고든다. 수필의 퇴고를 떠올린 건 바로 그때였다. 그렇다. 산다는 건 궁극적으로 매 순간 퇴고를 거듭하는 ― 낫으로 껍질을 벗겨 내고, 도끼로 옹이를 찍어 내고, 대패로 결을 다듬어 가는 ― 번뇌를 끊어 내고, 잡념을 털어 버리고, 착각과 허상을 지워 가는 일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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