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다. 경칩(驚蟄)을 이틀 앞둔 아직은 찬바람 속, 만물의 생동을 깨우고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단비다. 희뿌연 운무에 잠긴 산길은 신선이 머무는 비경이라도 되는 양 신비감마저 감돌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흐릿한 나무들의 군상은 마치 신상처럼 거룩해 보이기까지 한다. 특히 갑옷이라도 두른 듯 묵직한 소나무의 자태는 큰 나무는 큰 대로, 작은 나무는 작은 대로, 곧은 나무는 곧은 대로, 굽은 나무는 굽은 대로 저마다 옹골차게 기상이 늠름하다. 우산에 떨어져 내리는 호젓한 빗방울 소리에 ― 혼자라는 묘한 행복감에 ― 사뭇 젖어들던 가슴이, 언뜻 맞은편에 비치는 한 사람의 실루엣으로 대번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언제부터 사람들이 불편하게 느껴졌을까. 방금 산길에서 마주한 사람도 실은 일면식조차 없는 불특정 다수인 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내향적이지만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하고 솔직한 성격으로 타협과 절충보다는 은연중 흑백 논리를 지향하는 쪽이다. 틀린 게 아니라 서로 다를 뿐이라는 논조는 내심 부단한 사이비(似而非)로 치부하기도 했다. 그렇게 개인적으로 성글었던 대인 관계는 거개 데면데면한 차원에 머물렀는데, 정년퇴직 후 하나둘 줄기 시작한 사교모임은 어느 순간 중·고등학교 동창생 모임으로 한정된다. 이후 의례적이고 의무적인 만남에서의 점진적 해방이 시나브로 대인 기피에 가까운 외곬 향방으로 차츰 굳어진 것만 같다.
아내가 지인의 시어머니 이야기를 꺼낸다. 농촌의 한 지역에서만 팔순 넘어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명의 동무도 없는 사람이라며 몹시 신기해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렇다고 막무가내식 은둔형은 아니어서 교회에서는 집사의 직분도 가지고 있고, 더러는 동네 경로당에도 발걸음은 하는 정도라고 한다. ‘참, 답답한 노인네가 다 있네.’ 혼잣말을 하며 끌끌 혀를 차다가 문득 자신을 돌아본다. 이런, 이런. 바로 내가 그렇지 아니한가. 새벽 산행만 줄기차게 해 왔을 뿐 일 년 하고도 열두 달, 주기적으로 누구를 만나 차를 마시거나 술 한잔 나누는 친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정치(政治)가 한몫 거들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TV 뉴스를 멀리한 지도 꽤나 오래되는 것 같다. 뉴스를 틀었다 하면 미담 가화나 선행보다는 선동과 조작이 앞장을 서고, 협력과 융화보다는 중상과 모략이 판세를 가늠하는 지경이 자못 불편하고 언짢아서다. 거기에 질서와 조화를 등한시한 채 시기와 암투로 치닫는 일방향 논리의 잣대는, 21세기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가히 삼류 무협지의 완결판을 보는 듯한 민망함이기도 하다.
노인 인구의 증가 또한 무관치 않다. 정말 노인들이 많아졌다. 버스 안에도, 지하철 안에도, 산길에도 온통 노인들 천지다. 2024년 말 기준 우리나라 고령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어섰다고 한다. 말하자면 초고령 국가로 진입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누구나 오래 산다는 실체도 아니다. 75세까지 54%이던 생존율은 80세가 되면 30%로, 85세가 되면 15%로, 90세가 되면 5%로 급격하게 떨어진다.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곡강이수(曲江二首)의 시구(詩句) “인생 칠십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를 “인생 구십 고래희(人生九十古來稀)”로 바꿔야 될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어떻든 진즉부터 참신함과 풋풋함에서 멀어진 침체 심리는 현실적으로 미상불 거리 두기의 충분조건이 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가 리바이어던(The Leviathan)에서 도출한 말이다. 철저하게 인간의 이기주의적 관점을 설파한 대목이기도 하다. 생래적으로 타인과 공동체 영역이 어색하고 거북하게 느껴지는 건, 동서양 등 정도의 차이와 시공을 떠나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지나치게 살갑지 못한 개인주의적 성향이 가끔은 안타까워 짐짓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불현듯 벗에 대한 갈망이 샘솟듯 솟구쳐 오른 건 바로 그때였다. 그래, 아직 늦은 건 아니겠지. 그동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던 게야. 한번 촉발된 충동은 조급한 마음이 허둥대기까지 한다. 그 어느 것도 단정짓지 말자. 그냥 만나면 되는 거야. 그렇게 달에 한 번쯤 만나 서로 안부를 묻고 마주앉아 차를 마시거나 막걸리 잔을 나누는 거다. 그렇게 따뜻한 가슴이 되고 정다운 눈길이 되어, 새봄을 맞고 또 겨울을 지내다 보면 어느새 십 년은 금방 지나가겠지. 그런데 누가 좋을까. 그림처럼 동화같이, 선뜻 눈높이가 닿는, 수어지교(水魚之交)에 버금가는 그런 친구를 과연 만날 수 있을까. 한 사람에 대한 지음(知音)의 동경은 새삼 골이 깊어만 간다.
초등학교 보안관으로 근무한 지 네 해째 접어든다. 뇌리에 각인된 순간순간들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스스로의 탁월한 선택에 새삼 무릎을 치기도 한다. 청초하고 초롱한 동심의 세계에 적잖이 동화되었음이리라. 특히 학년 초 교문 앞에서 마주하는 1학년 아이들의 배꼽 인사는 천만금을 주고도 얻지 못할 무가지보(無價之寶)가 아니던가. 두 손을 아랫배에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90°가까이 꺾는 배꼽 인사는 ― 한 학기 지나지 않아 반절 이하로 줄어들기는 하지만 ― 말 그대로 한 폭 진경(眞境) 산수화에 다름없다.
사람에게는 윤형방황(輪形彷徨)의 기질이 있다고 한다. 눈을 가리고 걷거나, 사막이나 설원 등 사방이 똑같은 곳을 걸으면 방향 감각을 잃고 ― 치우쳐 걷다가 ― 결국 제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현상을 말한다. 짐짓 사람이 사람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가설이 될 수도 있겠다. 그래, 편향적으로 세뇌된 정치인들이나 정서적으로 메말라 노쇠화된 노인들이나, 한때는 그들도 모두 교문 앞에서 배꼽인사를 하던 눈부신 새싹들이었다.
중국 전국시대 진(秦) 나라 이사(李斯)의 상소문 구절이다. “태산불사토양(泰山不讓土壤) 고능성기대(故能成其大), 하해불택세류(河海不擇細流) 고능취기심(故能就其深)” ― 태산은 한 줌의 흙을 마다하지 않아 그 높음을 이룰 수 있었고, 바다는 작은 물줄기를 가리지 않아 그 깊음을 이룰 수 있었다 ― 그의 됨됨이를 떠나 심금을 흔드는 명문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그렇다. 하늘 아래 소중하고 귀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지는 꽃잎을 보고 아파하기도 하고 어두운 밤을 홀로 지새우기도 했던,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이 태산을 세우고 바다를 펼쳐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인생 구십 고래희(人生九十古來稀)”라 해도 기껏 남은 세월 겨우 십몇 년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나마 종심(從心)의 문턱에서 스스로의 옹색한 편협함을 알아챈 건 또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이제 그 누구라도, 어떤 경우에라도, 설령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불편해하거나 싫어하지는 말자.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를 가득 담아 자신에게 건네주자. 흔들리지 않는 자유와 평화와 지족의 왕관을 보란 듯 머리에 씌워주자. 혹여 여름이 가고 가을이 다 가도록 끝내 손잡을 친구가 생기지 않더라도 주름진 얼굴에 그늘을 더하지는 말자. 새봄이 되면 혹한을 견뎌낸 나무는 반드시 움을 틔운다. 비 내리는 이른 봄, 이렇게 나는 또 하나의 일흔 고개를 넘는다.(월간자유 25년 4월호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