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쪽같은 내새끼 프로그램에
과도한 보호와 통제를 하는 엄마와
감정을 잘 모르는 아이
그리고 부모의 스케쥴 관리와 통제가 없으면
불안한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엄마의 통제 안에 있으면 아이는 안전하다.
혼나지 않고, 다툴 일도 없고,
정답을 틀릴 일도 없다.
엄마가 원하는 답을 말하면
관계는 평온해진다.
그 안정감은 달콤하다.
하지만 그것은 ‘자율’에서 오는 안정이 아니라
‘통제적 안정감’이다.
틀을 벗어나지 않는 한 안전하지만
틀 밖으로 나가는 순간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된다.
그 아이는 답이 있는 문제를 좋아했다.
수학은 재미있다.
정답이 있으니까.
하지만 논술은 괴롭다.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야 하고
등장인물의 마음을 추측해야 하고
정해진 답이 없다.
세상은 점점
정답 없는 문제를 던진다.
친구의 표정,
선생님의 말투,
상황의 맥락,
보이지 않는 의도.
그런데 마음을 읽는 일이
쉽지 않은 아이였다.
오 박사는 말했다.
“감정 단어를 가르쳐 주세요.
구구단 가르치듯, 인수분해 가르치듯.”
그 말이 낯설면서도 정확하게 와닿았다.
우리는 공부는 가르치면서
마음은 가르치지 않는다.
“왜 몰라?”라고 묻지
“이럴 땐 속상할 수 있어.”라고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청소년기라면
의논하고 싶은 게 많을 나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법,
친구와 관계 맺는 법,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이 불편한지.
하지만 대화는 많아도
의미 없는 말만 오간다.
“숙제했어?”
“씻었어?”
“몇 시에 잘 거야?”
확인과 점검은 많지만
마음은 없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나를 보았다.
얼마 전 아이가 캠프를 간다고 했을 때
나는 불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건 조심해야 하고,
저건 꼭 확인해야 하고”
아이를 위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니
나도 불안이 높은 사람이었다.
확인해야 안심이 되고
계획이 있어야 안정이 되고
예측되지 않으면 초조해지는 사람.
그래서
혹시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통제적 안정감’을 주고 있었던 건 아닐까.
모든 문제의 실마리는
결국 나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 같다.
나는 왜 이 말을 했을까.
정말 아이를 위한 말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편해지기 위한 말이었을까.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내 불안에서 귀인하는지
한 번 더 들여다보자.
돌다리를 두드리는 마음이
아이의 다리를 묶는 밧줄이 되지는 않는지.
“오늘 하나 배우면
어제보다 내일이 낫다.”
그 말이 오래 남는다.
불안을 없앨 수는 없겠지만
불안을 자각할 수는 있다.
통제를 멈추는 연습,
대신 감정을 묻는 연습.
“왜 그랬어?” 대신
“그때 어떤 기분이었어?”
정답을 요구하는 대신
마음을 묻는 질문 하나.
오늘 또 하나 배웠다.
그리고 알았다.
배움은 행동으로 옮길 때만
비로소 쓸모가 생긴다는 것을.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두려움에서 오는지
사랑에서 오는지 말이다.
나는 오늘도
내 마음의 바닥을
조용히 두드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