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여는 사람들]
달리는 사람은 나이를 먹되 늙지 않는다. 달리는 순간만큼은 타임머신에 올라탄 듯 시간이 멈춘다. 삼일절 아침, 한강변을 함께 달린 89세의 K와 72세의 G. 나이를 잊고 달리는 그들의 미소가 좋았다. 비록 빨리 달리지는 못하지만 노화를 멈추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에게는 빠르게 달려야 할 이유가 없다. 노화를 멈추는 힘은 빠른 속도가 아니라 멈추지 않는 발걸음에 있다.
일주일 전에 대구마라톤에서 풀코스에 도전하여 고전했던 터라 좀 편하게 달리고 싶었다. 다행히 하프코스여서 마음이 조금은 느긋했다. 기온도 높지 않아 달리기에 적당했다. 삼일절 기념대회답게 작은 손 태극기를 들고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은 여성분 여럿이 눈에 띄었다. 밝은 웃음 속에 이날의 의미를 새기고 있었을 것이다. 하얀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짚신을 신은 풀코스 남성 참가자의 퍼포먼스는 단연 돋보였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기를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예전보다 참가자가 많았다. 아마 2주 뒤 열릴 동아 서울마라톤을 앞두고 몸을 점검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인원을 소화하기에는 주로가 협소한 편이다. 징소리를 신호로 출발했지만 사람들에 막혀 속도를 낼 수 없었다. 넘어지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달리며 한강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몸을 맡기자 기대감이 서서히 차올랐다. 2km 정도 지나니 호흡도 안정되고 주로의 러너들 사이의 간격도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몸도 풀 겸 편하게만 달리려 했는데, 생각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발 가는 대로 맡겼다. 굳이 속도를 제어하지 않았다. 달릴 수 있는 만큼 달려보자는 마음이었다. 신기하게도 지치지 않았다.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았는데도 페이스가 떨어지지 않았다. 결승선을 통과하며 기록을 확인하니 최근 10년 사이 가장 좋은 기록이었다. 기록에 연연하지 않으니 오히려 기록이 따라왔다. 기록보다 더 반가운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가벼워졌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길을 열겠다고 준비하지 않았는데도 길은 열렸다. 길은 준비된 사람에게 열리는 것이 아니라, 길 위에 나선 사람에게 열린다. 나이도, 젊음도 본질이 아니다. 주저하지 않고 한 걸음 내딛는 것, 그것이 길을 여는 열쇠다. 길 또한 사람의 발자국을 먹고 자란다. 그러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오늘 그 길을 달리면 어제와는 다른 삶이 된다. 어쩌면 더 이전의 나로 돌아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한 번의 발걸음이 삶의 결을 바꾼다. 삶이 고단하고 몸이 뒤틀릴 때,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일단 달려보자. 거기에 길이 있다.
[일시] 2026년 3월 1일
[대회] 삼일절 마라톤대회(뚝섬, 중랑천 일원)
[기록] 1시간 48분 42초(Ha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