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그리고 비움]
한 줄기 햇살이 모여 노을을 만들듯, 한 걸음의 발자국이 쌓여 마라톤을 완성한다. 그 한 걸음을 딛기 위하여 겨우내 추위를 견뎌내며 인내심으로 버텨왔던 자신을 검증하기 위하여 출발선에 선다.
동아 마라톤은 명실상부 우리나라 마라톤대회의 이정표다. 대회에 참가하기 쉽지 않아 3년 만에 기회를 얻었다. 오랜만에 얻은 기회여서 내심 기대와 설렘이 있었다. 광화문 광장이 떠나가라 외치며 가슴 벅찬 첫발을 딛는다.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출발해 혼잡하지만 기량 껏 달리는 발맞춤에 이내 질서가 잡혔다. 무탈하게 마무리하기를 기원하며, 지나온 마라톤의 여정을 떠올린다. 마라톤은 내 삶의 여백이었는데, 어느새 중심으로 옮겨와 있다.
청계천 길에서 '대한민국은 투표로 지킨다'라는 문구를 등에 붙이고 갓을 쓰고 한복 입은 백발 성성한 할아버지 마라토너를 만났다. 연세가 만만치 않은데 대단한 열정이다. 대한민국의 투표에 대한 문제점과 나름의 소신이 있을 듯싶어 진중하게 대화하고 싶었지만 아쉬웠다. 이내 시각 장애인 마라토너가 동행 러너의 도움을 받으며 힘찬 페이스로 달린다. 매번 마라톤대회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이지만, 그들의 열정은 정말 존경할 만하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파이팅 하십시오"라고 응원을 보냈더니 "감사합니다. 완주하세요"라고 외쳐주니 힘이 난다. 이어 예쁜 한복을 입은 여성 마라토너를 만났다. 자기만의 이벤트겠지만 함께 달리는 러너들에게는 힘을 돋우는 아름다운 열정이다.
쌀쌀하지만 덥지 않아서 달리기에 딱 좋은 날씨다. 30km까지는 별 무리 없이 잘 달려왔지만 그때부터 마라톤은 기록이 아니라 인내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아니나 다를까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에 무리가 온다. 페이스를 늦출 수밖에 없다. 러닝은 힘이 아니라 리듬이다. 리듬을 잃지 않으려 나만의 속도를 찾아 욕망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려 애쓴다. 나는 내 인생의 어느 공간을 달리고 있다. 어떤 한순간도 나태하거나 멈출 수는 없다. 침묵 속의 거친 호흡과 땀을 생각하며 이 공간의 의미를 찾자.
5km 지점에서 만났던 시각 장애인 러너를 결승점에서 다시 만났다. 힘들었을 그들의 한 걸음은 그 누구보다 값진 걸음이리라.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결승점을 통과하는 순간, 고단했던 나의 삶을 잠시 멈추고 지나온 길을 되새긴다. 나는 채우기만을 위해 달려온 것은 아닌가.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일진대 간과하지는 않았는지. '진정한 아름다움은 비움으로써 그 비움이 가져다주는 충만으로 자신을 채워가는 것이다.'라는 법정 스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인생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한 걸음, 오늘 하루를 알차게 쌓음으로써 채워지는 것이다. 삶은 먼 기대가 아니라, 지금 이 한 걸음의 태도에 달려 있다.
[일시] 2026년 3월 15일
[대회] 96회 동아 서울마라톤(광화문 ~ 잠실경기장)
[기록] 3시간 57분 3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