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견뎌내는 힘, 행복]
인간은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에베레스트 정상을 오른다거나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은 극한의 고통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겪는 고통과는 결이 다르다. 상식에 맞지 않게 왜 굳이 별난 고통을 즐기려 드는 걸까.
병상에서 오래 고생한 환자, 희귀병으로 완치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이들, 혹은 의식을 잃은 채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생명을 연장하는 환자의 가족들은 종종 “이제 편히 떠나셨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곤 한다. 연세 많은 할머니가 “그냥 잠자듯 갔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남은 삶에 큰 의미가 없을뿐더러, 죽어가는 고통마저 피하고 싶다는 뜻이다. 남은 삶을 살아야 큰 의미도 없을뿐더러 죽어가는 고통을 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 말에는 죽으면 고통이 끝난다는 믿음이 담겨있다. 죽음 자체가 행복일 수는 없겠지만, 고통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 자체가 행복이라는 의미다.
아버지께서 간경화 말기 판정을 받고 대학 병원에 입원해 의식이 오락가락하던 시기, 아버지는 고통을 자각할 여력이 없었겠지만, 가족들은 흐릿해진 의식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던 중, 의사가 종양이 의심된다며 조직검사를 권했다. 의료진의 설명을 믿고 순순히 동의했다.
조직 채취를 위해 전신마취했다. 보호자에게 세밀한 설명도 없었으니 으레 그렇게 하는 줄만 알았다. 조직 체취가 끝났는데도 아버지는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잠겼다. 간경화로 인해서 약물 해독 능력이 거의 없는 아버지는 마취 약을 해독하지 못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 와중에 목 안의 약해진 혈관이 터져서 응급상황이 발생했다. 피가 폐로 고여 호흡기를 삽입하기 위하여 기도를 확보해야 하는데, 지혈도 되지 않은 상황이니 의사들이 허둥대고 있었다. 그때 의사가 기도 삽관을 위하여 강제로 도구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경우 목에 상처가 깊어져 지혈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한다.
보호자의 선택이 필요했다. 기도를 확보해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라 결국 가족들은 아버지를 집으로 모시기로 결정을 내렸다. 산소마스크를 씌운 채 간호사와 함께 응급차로 귀가했는데, 집에 도착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고통에서 벗어났다. 그 순간은 과연 행복했을까.
마라톤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35km를 지나 고통의 극한치에 닿으면 내면에서 갈등이 일어난다. 왜 달리고 있는가. 이대로 멈추면 안 되는가. 무슨 영화를 보려고 이 고통을 스스로 선택하는가. 다음에도 또 달릴 것인가. 삭여낼 수도 없는 번뇌를 억지로 새김질하지만, 좀처럼 소화되지 않는다.
겨우내 연습이 모자랐던 탓으로 결승점에 다가갈수록 축축 늘어진다. 마음만 뻔하지 발이 움직이지 않으니 안타깝다. 그런데도 씩씩하게 속도를 유지하며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다. 부럽지만, 그들 또한 고통을 견디고 있다는 점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라톤은 고통을 압축시키는 행위이다. 결승점에 이르면 압축된 고통을 순간적으로 폭발시켜 지워버린다. 그때 느끼는 희열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은 천하를 얻는 기쁨이다. 결승점에서 느낄 수 있는 잠시의 행복을 위하여 힘든 고통을 인내하는 우리는, 어쩌면 정상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결국, 고통을 견뎌내는 힘은, 행복이다.
그러고 보면 괴로움(고통)과 행복은 같은 바구니에 담긴 달걀과 같다. 즉, 서로를 구분할 수 없으면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운명인 것이다. 괴로움 없는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은 행복의 디딤돌인 것이다. 우리가 평생 별러 찾고자 하는 행복은 괴로움과 별거가 아니라 아웅다웅 곰살맞게 동거하는 동체인 것이다. 행복이란 자기만의 특별한 향기를 지닌 것이 아니라, 괴로움이라는 마른 꽃잎을 따서 고요히 정리하는 일이다.
마라톤은 고통이다.
마라톤은 행복이다.
[일시] 2024년 3월 17일
[대회] 94회 동아마라톤(광화문, 잠실운동장)
[기록] 4시간 4분 0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