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사랑한 그 작품, 누가 만들었나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붉은 하늘 아래에서

by 린새



당신이 사랑한 그 작품,

누가 만들었나요?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본 날이 있다.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래서 꼭,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사진 한 장에 그 풍경을 담아, 내 SNS 프로필 사진으로 걸어두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진과, 내가 느꼈던 감정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다.

나는 다른 사람의 SNS 프로필 사진에서 내 사진을 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기쁘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

내 사진이 누군가의 눈에도 아름다워 보였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동시에 마음속 어딘가에서, 뾰족한 얼음조각이 굴러다녔다.

그것은 내가 온 마음을 담아 찍은 사진이었다. 그때 내가 느낀 감동과, 벅참을 필름으로 풀어낸, 나의 추억의 한 페이지였다. 하지만 그 사진은, 내가 모르는 사이 다른 사람의 공간에 조용히 걸려 있었다.

내 이름 한 글자 없이 말이다.


“프로필 사진 뭐야?”

“아, 사진 예쁘지?”

“그러게. 근데 누가 찍은 건지 알아?”

“몰라? 그냥 인터넷에서 주웠을 걸?”


내 사진은 알고 있으면서, 정작 사진의 주인은 몰랐다.

사진 귀퉁이에 이름이라도 적어둘 걸 그랬나? 하지만 이름이 적힌 부분은 잘라내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빼앗기는 구조에 화가 났다.


결국, 그 애한테 말했다.


“그 사진, 내가 직접 찍은 건데… 혹시 어디서 났어?”

“아, 그래? 그럼 네 프로필 사진 캡처 했었나 보다. 잘 찍었네?”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이 웃으며 말하는 그 애의 표정이, 내 마음을 아무렇지 않게 훔쳐간 사람의 여유처럼 느껴졌다. 스스로가 어떤 행동을 한 것인지, 그게 누군가에게 어떤 모욕의 칼날이 되어 상처 입힐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피해자는 나였고,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가해자는 그 아이였다.

그런데 왜 내가 이렇게 힘들어해야 할까?


나는 최소한 내게 동의를 구했어야 했음을 말했다. 저작권이 무엇인지, 창작물이 왜 존중받아야 하는지.

그 와중에 나는 두려웠다.

그 애가 “그까짓 사진 좀 쓰면 어때서?”라고 말할까 봐, 별것도 아닌 일에 유난스럽다고 할까 봐.

다행히, 그 애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고 내게 사과를 했다.

악의가 아니었다. 그저 몰랐던 것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어릴 적 학교에서, 저작권에 대해 단 한마디라도 배웠다면 어땠을까.

필수 교육과정에 저작권이 한 번이라도 제대로 언급됐다면 그 애는 내 사진을 마음대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저작권이란, 내가 만들어낸 결과에 대해 최소한의 존중을 요구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누군가의 노력이 엉뚱한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일이 많다. 회사에서 사원이 쌓아 올린 성과를 상사가 가로채는 경우처럼 말이다. 이런 사연이 공론화가 되면, 그 상사는 대중의 뭇매를 맞는다.

하지만 아직도 ‘창작’은 쉽게 소비되고, 쉽게 도용된다. 창작자가 내 작품이 도용되었다고, 다른 사람이 이익을 취하고 있다고 목 놓아 소리 지를 때, 사람들은 말한다.


“이 정도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 않아? 그냥 비슷한 것뿐인 것 같아. 그게 그렇게 큰 문제야?”

“이래서 예술 쟁이 들이란, 너무 예민하다니까.”


예민하단 말은, 피해자의 입을 막는 가장 손쉬운 도구이다.

그래서 난, 예민하다는 말을 증오했다.


창작은 감정과 시간이 깃든 노동이다.

사람들은 몸의 노동은 인정하면서도, 감정과 표현의 노동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렇게 노동의 가치가 무시되어, 창작자가 쏟아부었던 모든 노력은 부정당한다.

우리는 감정의 노동도 가르쳐야 한다. 결국, 모든 변화는 교육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그림을 베껴 그릴 땐, 그 그림의 작가를 알아야 해.” “노래 가사를 쓸 땐, 누가 만든 건지 적어야 해.”라고 배웠다면 어땠을까? 노동의 가치가 존중되듯이 창작의 가치도 존중받는다는 걸, 제도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면 세상은 창작자들에게 지금보다 조금 더 다정했을지도 모른다. ‘그 작품은 주인이 있는 거야’를 이해하는 아이들 어린아이들에게 지금의 창작자들이 느끼는 감정을 조금이라도 경험시켜 줄 수는 없을까?

이런 방식은 어떨까.

아이들에게 예쁜 나뭇잎을 하나씩 주워오게 한다. 다음날, 전시회를 열겠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각자의 눈으로 가장 예쁜 나뭇잎을 골라 이름을 적고, 조심스레 선생님께 건넬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그 반짝거렸던 나뭇잎을 친구들 앞에서 자랑할 순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것이다. 이불을 꼭 쥐고 행복한 단꿈에 빠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날, 전시된 나뭇잎은 모두 다른 아이들의 이름 옆에 걸려 있다. 아이들의 얼굴은 당황과 혼란으로 물든다. 곧, 허무함과 배신감이 밀려온다.

그때 선생님이 말한다.


“남의 것을 함부로 내 것처럼 꾸미면, 이런 기분이 들어요.”


그리고 아이들이 나뭇잎을 서로 주인에게 돌려주게 할 것이다. 아이들이 나뭇잎을 돌려받으며, 그 순간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방식이 정서적으로 조금 거칠 수는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창작자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뭇잎을 돌려주며,

서로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순간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나는 교육자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이 아이디어를 더 다듬어 미래의 창작자들을 위한 교육으로 발전시켜 주기를 바란다.


교육으로 그게 된다고?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교육으로 인해 사회적 인식이 바뀐 사례는 분명히 존재한다.

화이트칼라, 블루칼라로 직업을 나누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고 말한다. 교육으로 인해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다는 증거이다.


모든 창작의 결과물은 단순한 작품이 아니다.

누군가의 마음에서 태어난 감정의 결정체이다.

그 가치를 지킨다는 건, 결국 사람의 마음을 지키는 일이다.



당신이 사랑한 그 작품.

그 마음은, 누구의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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