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적 지리 덫에 걸려들다

(강토에 서서 산하를 바라보다 제27화)

by 오해영

한반도 지명의 도주 글자에 무엇이 숨어있을까?


사람들은 삶터를 토대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간다. 이러한 삶터들이 모여 연맹체를 구성하게 되면 전체 지리를 자연 경제 정치 관점에서 구분을 한다. 더 나아가 연맹체가 국가 체제로 접어들면 강역을 대상으로 지방행정 기획하고 그 계층에 맞는 글자를 부여한다.


그 위계를 표시하는 글자가 지명의 끝에 쓰인 00도 00주 00 군이다. 물론 각 공동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이다. 이런 행정 위계질서를 표시하는 도군주는 고대 중국왕조에서 시작되었는데 어째서 한반도의 행정체제에 들어왔을까?


지리 관점에서 본 중국의 행정 위계 구성


예나 지금이나 중국의 지방행정 단계의 기본은 군현행성郡縣行省 체제이다. 이 군현행성은 자연지리와 행정구획의 상호작용으로 명칭이 만들어졌는데 그 배후에 들어있는 이야기를 살펴보자.


중국 땅에 살았던 종족들은 일찍부터 지역을 구획하였는데 그들의 옛 서적을 보면 이름난 산과 하천을 참고하여 전국을 구분하였다. 이에 관한 내용 9주 이외에 오복제도에서 나온다.


9주가 자연지리와 경제지리 결합이라면 오복은 정치지리 개념에서 나온 것으로 단순한 지역구분이 아니라 정치적 역할을 담는 표준 그릇이었다. 달리 말하면 중앙에 대해 지방에서 담당할 의무를 표현한 개념이었다.


오복 개념의 형성을 보면 다음의 이야기가 있다. 중국 땅에 먼저 정착한 사람들은 제일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을 차지하고 삶터 만들었으며 그다음에 온 사람 또는 부족은 그다음의 땅에 삶터를 지었다. 그런 후 핵심 삶터 사람들은 주변 지리를 관제할 수 있는 개념을 만들고 구획했다.


즉 오복 제도는 천자가 거주하는 핵심 거주지인 국도大城邑를 중심으로 주변을 계층적으로 구획한 개념도이다. 국도로부터 거리의 가까움과 멀기에 따라 전복甸服·후복侯服·수복綏服·요복要服·황복荒服이라 이름 지었다.


복과 복의 거리는 약 500리이었다. 유교에서는 오복을 더 세분하여 9층(후복 만복 남복 채복 위복 만복 시복 진복 번복)으로 구획하였다.


오복은 전국시대에 편찬된 상서 우공에 나오는데 천자의 지방에 대한 관리 권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방의 수준에 따라 통제 내용을 달리하여 나눈 것이다. 중국인 입장만 생각한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오복의 층계는 점에서 면으로 끊임없이 분해 확장되어 최종으로는 문명화된 중화와 야만스런 오랑캐를 뜻하는 세계관으로 발전시켰으며 이 개념을 지도상에 그렸다.


한반도, 삼한이 삼국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오복 덫에 빠지다

한반도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중국 오복 개념에서 포함되기 어려웠다. 설사 중국인들이 포함된다고 주장한다면 야만인이 산다는 황복에 해당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삼한은 바다 건너 멀이 있어서 중국인들의 세계관에 포함되기가 어려웠을 것이기에. 그래서 중국의 오복 제도의 영향이 없거나 있다 할지라도 아주 미미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 삼한(마한·진한·변한)은 자체적인 세계관이 있었다. 중국의 천자는 삼한을 지배하지 못하며 하늘의 지배자는 따로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삼한은 각 집단이 자기 하늘을 받드는 제사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삼한의 소국끼리의 관계나 이들의 대표자의 성격을 보면 중국의 경우와 많이 달랐다. 삼한은 소국의 느슨한 연합체로 지방 관리는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각자 관리하였다. 소국의 중심 삶터의 우두머리인 군장이 독자적인 관리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 군장이 신지 험측 번예 살해 읍차이다.


그런데 중국의 오복 개념은 천자 중심의 도덕 정치적 위계질서를 나타내는 것으로 조공과 책봉을 전제로 한 제국적 세계질서 개념인데 삼한의 경우도 이 덫에 빠지게 된다.


삼한은 한반도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낙랑이나 대방등을 매개로 하여 중국과 무역을 하였는데 무역 규모가 커지고 거래가 빈번해지면서 소국의 군장 연합체 대표들의 정치적 경제적 야심이 커진다. 즉 삼한의 수장들은 무역의 대가로 중국 천자로부터 받은 작위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내부의 지위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러다가 삼한이 삼국시대로 바뀌면서 중화와 야만을 구분하는 중국의 오복체제 세계관인 빠져들게 된다. 즉 삼한에서 삼국으로 넘어가면서 삼한 자체를 중심으로 하는 천하관이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에 묽들고 중국 땅의 거대한 구심력에 빨려 들게 된 것이다.


그 기점을 지리적으로 보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출발점은 영토가 삶터를 넘어서고 소국연맹에서 영역국가로 바뀌면서 광역 지배자가 군사행정 권력을 강화하기 시작하면이다.


이 시기에 들어 서면 지명 성격도 바뀐다. 삶터의 자연 특징에 따른 지명이 중심 국가의 지방에 편입된다. 정치색을 띤 행정지명으로 바뀌고 역할이 생활에서 지배 질서를 의마하게 된다. 그러면서 지역의 고유 지명이 중국식 한자를 빌린 표현 방식으로 바뀐다.


이제 지명은 중앙집권제 국가의 질서를 설명하는 정치적 의미의 수단이 된 것이다. 바로 이점이 삼한과 삼국을 가르는 보이지 않은 경계선이다 할 수 있다.


삼국의 중국 오복 제도에 대하는 태도는 달랐다. 고구려는 스스로 중국 천자에게 봉사하는 변방국이 아나라 천하를 놓고 경쟁하는 또 다른 중심으로 여겼다. 그리고 전국을 5부로 나누고 그 아래 성이 있으며 성주를 욕살이라 하였다. 성주는 관할 지역 내의 행정사무 맡아보면서 군사적 역할까지 담당하였다.


백제는 웅진 이전 시기는 파악이 어렵고 웅진 천도 후 왕족이나 귀족이 각 지방을 다스리는 봉건적인 관리 체제이었다. 중국과는 해상교통을 이용 중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로 중국의 책봉을 수용하고 중국식 관제·의례를 도입하였다.


지방을 오방제五方制로 나누고 방의 책임자를 방령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사비시대로 도읍을 옮기면서 중앙집권적인 성격이 강화되어 방령 밑에 약 10개소 정도의 군을 두었다.


신라는 가장 늦게 지방제도를 정비하였는데 지증왕 시기인 6세기에 주군제도州郡制度를 도입하였다. 주는 지방의 행정 군사거점이었다.


즉 삼국시대로 되면서 삼한의 병존 지리인식이 중앙에서 지방을 편제하는 지리 인식으로 전환이 일어났다. 그러고 세월이 흐르면서 삼국은 중국의 세계관에 제대로 빠져들었는바, 삼국의 중국으로부터 책봉받은 벼슬 이름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 : 상주국 요동군왕 고구려왕, 백제 : 부여국 대방군왕 백제왕, 신라 : 주국 낙랑군왕 신라왕


정리하여 표현하면 도·군·주는 단순한 행정 단위가 아니라 세계관을 의미하는 지명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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