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의 생존력과 강토의 변화

(강토에 서서 산하를 바라보다 제26화)

by 오해영

왜 중국의 강탈형 지명은 살아남고 삼한의 병존형은 사라졌을까?


한번 생겨난 지명은 그대로 있지 않고 성장 쇠락 그리고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지명의 여정은 강토의 확장 축소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공동체의 삶터가 강토의 이곳저곳에 들어선 후 변화를 겪는데 발전하여 다른 삶터로 퍼져나가거나 반대로 축소되기도 한다. 지명은 이런 변화 과정을 지켜본 바, 지명을 살펴보면 이들의 속살을 볼 수 있다.


중국의 오래된 지명유산인 우공 9주는 성장 발전하여 그 개념을 원래의 중국 밖으로는 확장하였고 원래의 땅에 그 자취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지명유산인 삼한의 경우 강토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쇠퇴하였으며 외부로부터 유입된 지리 문화에 치여 원래 지역에서 조차 소멸되었으며 현재의 지명에도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이렇게 중국과 한반도의 지명유산은 왜 다른 궤적을 그렸을까? 이런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국주의적인 중국 지명의 생존력과 확장

우공 9주 체제는 지명 분야에서 이상적인 모델이 아니다. 의도를 가지고 지리 교통 물산 인문요소를 계산하여 설계 한 만들어진 모형이다. 통일제국인 진한秦漢의 출현으로 이전 시기 여러 제후들이 자기중심적 지리 관점에서 작성하였던 지리모형은 통일제국으로 편입되었다.


또한 문서와 책을 다를 줄 아는 많은 문법리文法吏는 진한 제국에서 법령과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실무관료로 자리하였다. 이들이 지리와 지명을 담당하면서 전국각지의 정보를 끊임없이 중앙으로 보내고 제국은 종합했다. 이리하여 9주 체제는 마침내 제국의 실제적인 국가관리 지리로 운용된다.


이런 과정에서 한무제의 역할이 매우 컸는데 그는 9주를 발전시켜 13주로 확대했다. 13주는 익翼, 옹, 청, 서, 형, 양, 예, 익益, 유, 병, 삭방, 교지이다.


각 주州마다 감찰권한을 가진 자사 1명을 파견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13주는 개념적인 지리지인 우공 9주와 다르게 지방행정의 실제 지리로 변화되었다.


왜 개념적 지리관이 국가의 지방행정 지리로 발전되었을까? 이러한 결과는 강토의 확장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한무제 시기에 중국문화가 컨트롤하는 권역이 매우 커졌다. 또 공양가라고 불리는 유학자 집단은 중국은 하나여야 한다는 대일통 주장을 펼쳤는바, 한무제는 이들의 사상에 푹 빠저 들었다.


한무제의 강토 확장 과정을 보자. 우선 흉노를 그들의 영역 밖으로 축출하였다. 원래 중국의 서북지역의 운중군에 있는 흉노도 몰아내고 흉노와의 전쟁 주도권을 잡았다. 그리고 내몽고 지역(하투지방)에 삭방군 설치하여 13주로 편입했다,


또 흉노에서 발생한 내분을 이용하여 하서지역에 무위 주천 장액 돈황등 4군 두었다. 이 4군에 9주의 옹주 지역에 병합하여 양주라고 하였다.


이번에는 동남자역에 있는 남월을 멸망시킨 후 9군 설치하고 교지라 하였다. 그리고 서남이 지역의 귀주 운남등을 병합하여 군을 설치하고 9주의 양주와 합하여 익주라고 명명했다.


또한 우공 9주 중 지나치게 큰 주를 분할하였는데 예를 들면 동북지역의 익주를 익주 병주 유주로 나눴다.

그리고 9주의 옹주지역인 관중지역을 황제가 직접 관할하는 경기구역으로 편제하고 나머지 서부지역은 양주에 포함시켜 옹주를 폐지하였다. 이런 주의 신설 병합 폐지 과정을 통해 왕국의 살림살이가 강화되었다. 이런 내용이 종합되어 유교경전인 상서우공이 편집되는 결과도 가져왔다.


한무제의 13주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자사를 주목州牧으로 하여 단지 감찰권뿐만 아니라 행정권을 가지게 되어 지방행정을 총괄하는 행정단위로 변화된다.


동한東漢 때가 되면 주목은 지역의 권력을 토대로 지방 호족과 합류하여 각지를 분할 관리하는 제후로 변해갔다. 예를 들면 유비는 익주를 강탈하여 스스로 익주목이 되었으며 위진남북조 시기가 되면 수많은 영웅이 자기 기반의 주를 바탕으로 천하패권 다툼에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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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 13주 위치도)



이후 당나라 송나리 원나리를 거치면서 지방행정을 새롭게 구획하고 옛 9주는 최상급 행정 구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좁은 지역의 행정단위에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오늘날의 강소성 양주시, 산동성 청주시, 산동성 재녕시 옹주구, 강소성 서주시, 호복성 형주시등이다. 그리고 일부는 성의 약칭으로 쓰이고 있는데 하북성의 익, 하남성의 예 등을 들 수 있다.


축소형인 삼한 지명의 쇠퇴와 소멸


지명과 지리 관점에서 삼한 체제를 중국의 9주 체제와 개략적으로 비교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삼한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었지만 삼한의 강토 전체를 총괄하여 살펴보는 개념은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하다 보니 삼한 각지의 지리정보를 중앙으로 모이게 하는 활동이 없었다.


또한 삼한 밖으로 강토를 확장하는 시도는 없고 우리 겨레의 큰 영역인 만주지역이 상실되자 오히려 삼한 강토는 혼란을 겪는다. 즉 그 지역으로부터 많은 이주민이 남하하여 원주민과 서로 융합되지 못하고 혼재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결과 삶의 공동체에서 시너지 효과를 보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지명이 삼한의 밖으로 확장되지도 자체적으로도 살아남기도 못해 지명의 삶이 끊기게 되었다.


삼한 지명의 생존력은 약하여 밖으로 확대되거나 내부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사유를 생각해 보면 삼한 지명의 성격은 정치성 보다 자연지형에 기반한 삶터의 명칭에 가까웠다. 그래서 삼한의 수많은 지명인 국명은 생활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성격이다 보니 중앙권력 강화 체제로 바뀐 삼국시대에 지명은 힘을 크게 잃고 사라진다. 이를 권역별로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마한의 경우 만주에서 남하한 백제 세력이 충청권역에 중심을 두고 급속한 성장 하면서 기존 54개 국가 이름은 소멸되어 갔다. 그러나 전북지역은 무령왕시기 520년경 전남지역은 성왕시기 530년 경 백제로 편입된바 이들 지역의 경우 천천히 그리고 느슨하게 흡수가 이뤄졌으나 지명이 사라지는 마찬가지이다.


가야의 경우 신라에 강제 흡수되었는데 즉 김해지역의 금관가야 532년 고령 대가야 562년 편입된다. 이처럼 마한과 기야는 강토의 확장이 아니라 다른 세력에 흡수방식으로 소멸되어 갔다.


그리고 강토 확장을 추구하는 국가는 중앙과의 행정 위계를 강조하면서 지역의 지명을 바꾼다. 이런 과정에서 삼한의 나라이름은 소멸, 군현 이하의 행정 이름으로 생존, 음운만 남아 한자 지명으로 스며든 경우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관련 자료가 없어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사민지역.png

(한반도의 대규모 이민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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