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토에 서서 산하를 바라보자 제28화)
네 죄는 네가 알렸다! 현 사무실에서 사또의 권력 행사로 개인의 복수가 아님.
왕조시대 사또는 지방행정을 집행하는 현의 최고 벼슬아치로 백성의 삶을 좌지우지하였다. 지역 생활공동체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가진 중앙권력의 대행자 신분.
이 권력의 원천과 강도는 중앙조정과 지방의 관계에서 나왔다. 중앙은 지방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구분한 뒤 지명을 부여했다. 이 중에서 중앙에서 많은 주의를 기울인 단위는 위계질서의 끝에 있는 현縣이었다. 왜냐하면 현은 중앙권력을 대행하여 세금 징수와 병역의무를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이 현은 지명의 구성요소로 중국에서 이천 년 훨씬 전에 발명된 지방행정 단위이다. 중국에서는 현재까지도 사용되나 한반도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일천 년 이상 사용되다가 조선말 갑오개혁 때 사라졌다. 이처럼 현의 생명력과 생사가 한반도와 중국에서 다른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진시황은 전국 통일 후 새롭게 편입된 지역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가 숙제였다. 넓은 강토를 어떻게 나누고 지명을 부여할 것인가에 대해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자. 승상 등 대부분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은 중앙조정의 역량이 미치지 못하니 황자들에게 나눠주고 관리하자고 주장하였다. 물론 진시황을 대리하는 역할이라고 강조하면서.
그러나 사법관직인 정위 벼슬에 있는 이사는 앞 왕조인 주周 나라를 예로 들면서 반대하였다. 주나라의 건국자인 주문왕 주무왕이 아들과 형제를 중요지방의 제후로 임명하여 그 지역을 관리하게 하였지만 같은 혈육임에도 서로 싸우고 주 천자는 저지하지 못해 결국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고.
따라서 분봉제는 아니다. 조정은 모든 지방에 군현을 설치하여 중앙에서 직접 관리해야 된다. 아울러 통일에 공을 세운 신하는 땅이 아닌 세금으로 보상하면 된다고 하면서.
이사의 말을 들은 후 진시황은 결론을 내리길. 봉건제 왕조인 주나라에서 모두의 삶은 고역이었고 전쟁은 끝이 없었다. 또다시 제후를 세울 수 없다.
그리고는 지방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산천지리에 따라 구획하고 군현제로 체계화하였다. 전국에 36군 설치하고 각 군에 수守(군수), 위尉(군사), 감監(감옥)의 기구를, 군 밑에 현을 두어 직접 관리를 파견하였다.
정치지리 개념인 오복제를 배제한 군현제
봉건제의 제후는 자기 강역에만 관심이 커서 중앙 조정에 대해 소홀하고 타 지역은 관심이 없었다. 중앙은 지방통치 능력이 강하지 못해 이곳저곳에 대읍을 설치하여 백성을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이와 반대로 군현제는 중앙조정 역량의 극치를 이뤄 모든 지역을 직접 통제하는 시스템이었다. 말하자면 오복체제로 말하면 먼 곳의 요복 황복을 가까운 지역의 전복으로 전환함을 의미했다.
그래서 군현제는 오복체제를 배제하고 행정으로 지방을 관리하는 지명 정책이었다. 또한 하늘 아래 모든 강토가 왕토임을 선언한 일대 사건이었다. 이것이 진시황의 속 마음?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 나중에 생겼는데 후대에 이 시스템의 결점(진동하는 현에서 양끝의 정지하고 있는 점)은 분쟁을 초래하는 씨앗이 되었다.
이 현縣은 어디에서 왔을까?
현은 하늘에서 진시황 머리에 떨어진 것도 진秦국에서 처음 설치한 제도도 아니었다. 통일이전에 이미 현이 있었다. 즉 진 효공이 상앙의 건의에 따라 나라를 개혁할 때 변경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시골의 향읍을 모아 현이고 불렸다 한다.
춘추역사서인 좌전을 보면 기원전 598년 주周나라 선공 때에도 현의 기록이 보인다. 그해 겨울 진陳국에서 왕과 대신들의 성추문으로 내란이 야기되었는데 초나라 장왕은 이 난을 이용하여 진국을 정복하고 초나라의 현(현진縣陣으로 표현)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 사건 이전에도 초나라는 정나라가 싸워 이겨 정나라를 현으로 편제하겠다는 정백鄭伯 건의도 보인다. 하여튼 초나라는 주변 제후국을 멸한 후 현(정, 권, 현, 황, 변, 강, 육, 멍, 용, 신, 식)을 설치하였다.
이처럼 현의 설치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큰 나라가 약소국을 멸망시키고 현이라는 행정구획을 설치함이 추세였던 것이다. 진시황도 이런 추세를 따랐음.
현은 어떤 지역에 설치하였나?
서주西周 중기 낙양에 군사요지인 진鎭을 재건하는 내용을 기록한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명문에 정현 풍현이라는 지명이 새겨져 있다. 정현 풍현의 위치는 낙양 주변의 왕기王畿로 현은 천자가 직접 관리하는 경기지역 내 있었다.
이런 설명은 현의 글자에서도 알 수 있다. 현의 본뜻은 현과縣挂 계系이다. 수도를 둘러싼 왕기에 쓰이는 지리의 글자이며 정치적으로는 천자가 관할하는 땅임을 강조할 때 쓰였다.
그러나 진제국의 현은 이전 왕조의 현과 달랐다.
서주와 춘추전국시기 현은 수도 주변에 임시로 구획한 구역으로 지방행정으로 역할은 없고 경기지역 벼슬아치인 경대부의 식토 또는 채읍지이었다. 춘추시기에 들어서자 주 천자 권위는 쇠락하여 제후의 강토에서 영향력을 상실해 갔다. 그러자 힘이 강한 제후는 주 천자의 현을 본떠 자기 봉토에도 차용하기 시작했다.
전국시대 중 후기에 접어들자 제후는 전쟁압력이 커져 국력을 모두 동원해야 할 상황에 처해졌다. 그래서 현을 강화하여 지방행정 단위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현의 모델이 되었다.
삼한이 삼국시대로 편입이 되고 삼국은 중앙집권제를 지향하였는바, 기존 삼한의 지배층을 그대로 두고 지방을 행정체제를 바꿔 나갔다. 현은 중앙권력과 토착 권력의 접점지대로 삼한의 소국이 삼국의 지방행정 체제로 전환된 것이다. 그래서 토착인의 인식은 예전과 큰 차이를 보기 어려웠다.
현은 명목상 지방 관리 체제로 편제된 바, 중앙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한 경우는 무척 적었을 것이며 토착 세력이 실질적으로 현을 운영하고 중앙은 현을 통해 세금 병역 충성 다짐 등을 하는 정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현은 중앙의 지배를 선언하는 형식이었으며 지방도 중앙에 복속된 지역임을 인정하는 이름표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것이 중국의 경우와 크게 다른 점이었다.
삼국별로 개략적으로 보자. 고구려는 지방을 성城 중심으로 지배하였으며 현은 행정단위 역할보다는 성을 지원하는 보충대 기능을 하였다. 백제는 가장 먼저 군현제를 정비한 것으로 보이는데 지방을 5방·22 담로 나누고 아래에 군·현 배치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현은 지역 유력자의 자율성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경우 진흥왕 이후 급격히 늘어난 정복지에 현을 설치하였지만 정복자의 기록물에 가까웠다. 군현제가 확실하게 실행된 것은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의 일이다. 통일이전은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하지 않은 명목만 있고 속 내용물은 지역에서 채웠다.
그러다가 조선에서 현이 제대로 역할을 하게 되었으나 망국시기인 조선말에 군에 흡수되어 소멸된다. 이때가 지명어인 현의 단절 지점이다.
결론적으로 중국과 한반도의 현은 생명력이 달랐다.
진시황의 현은 오복제를 대신하였고 또한 그간 수많은 정치적 변화가 있었음에도 지금까지 살아있다. 이처럼 현은 단순한 행정단위를 넘어서 행정질서의 말단이면서 제국의 공간을 세분화하는 구성자로 역사 서술의 최소 단위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서 진시황은 지명세계에 중대한 영향을 마쳤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한반도의 현은 비록 우리의 창조물은 아니나 우리 강토의 여건에 맞게 운용되어 왔으며 나라가 망할 무렵 사라진다. 그렇지만 자율성이 현의 생명력이 천년이상 이어지게 되는 비밀이었으며 단순한 지방행정 단위로 여김은 너무 가벼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