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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해영 Jan 17. 2024

먼 옛날의 기억을 어루더듬다
(창해역사 설화)

같은 장소 다른 기억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비슷한 부류가 함께 경험을 할 경우 그곳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다르고 경험내용이 다르면 같은 장소라도 인식의 상당히 달라져 자칫 다른 장소에 대한 이야기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시간이 흘러 먼저 인식한 기억이 사라지고 새로운 인식으로 바뀌었을 때 그 괴리를 이어 줄 잊어버린 기억을 더듬어 봄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어떤 특정 장소에 대한 특이한 경험 이야기를 해본다. 초등학교 시절 시골 마을(80여 가구)에 초당이라 불리는 서당이 있었다. 조선시대가 아니고 70년대 이야기이다.    

  

 이 서당은 한옥 건물로 동네 가장자리의 조그마한 구릉 아래에 위치하며 방이 3~4개, 대청 그리고 마루로 이뤄져  있었다. 그곳에 갓 쓰고 도포 차림을 하신 서당 선생님이 한 분 계셨고 마을 애들이 겨울방학이 되면(여름방학에는 들판에 나가 일함) 서당에서 숙식하면서 한문을 배우고 붓글씨 쓰기를 하여야 했다.    

  

새벽이 되면 선생님은 애들을 깨워 서당건물 밖에 있는 연못에 가서 세수를 하게 하여 정신이 들게 하였다. 물이 얼어 있을 때도 있어 얼음을 깨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고.    

  

우리는 방에 돌아와 선생님을 바라보고 줄을 맞춰 양반다리 자세를 하고 앉아 전날 배운 것을 외워야 했으며 못 외우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다. 물론 당시 마을에 전기가 인입되지 않아 호롱불을 켜놓고서.      


그랬던 서당이 언제인가부터 빈집이 되었다가 몇 년 전부터는 대도시인들의 1박 2일 휴식처로 변하였다(KBS 1박 2일 프로그램에도 나옴).  


2010년대에 같은 사무실의 동료가 이곳에서 휴가를 보냈고 그 소감을 내게 이야기를 하였는데 내의 기억인 배움터 서당이 아니고 놀고 쉬는 가족 휴양지였다.      


이곳을 휴식처를 이용한 이들은 과거의 이 장소에 어떤 사람들이 무엇을 하였는지 모른 것이다.  그래서 같은 장소이지만 내가 가진 인식은 ‘서당, 선비 차림의 선생님, 꾀죄죄한 학동’의 단어들이 떠오르고 요즘 이용한 이들의 인식은 ‘옛날 분위기가 있는 색다른 휴식지’ 일 것이다.  


        

강릉지역은 한반도를 남북으로 길고 높게 갈라놓은 태백산맥으로 인해 동서지역 간의 교류가 적었다. 특히 먼 옛날에 교통수단이 열악하였을 때 더 심하였을 것이다. 오히려 산맥 동쪽에 위치한 경주나 원산 등 남북 지역 간 교류가 더 쉬웠을 것이다.     

 

과거 한반도의 주류역사가 태백산맥의 서쪽 지역에서 이뤄져 강릉은 심리적으로 아주 먼 외딴섬 같으며 자기들끼리의 격리된(?)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지역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남다른 강릉을 이야기하는 창해역사 설화 1     


진시황 시절에 강릉에 창해역사라는 힘이 무척 센 장사가 있었다. 진시황의 학정이 심해지자 장량(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의 전략가)이 그를 죽이려고 여러 노력을 하였으나 지키는 병사가 많아 실패하였다.   


 그래서 강릉에 와서 창해역사를 초청하여 진시황을 죽이려 하는데 행차하는 수레가 천대가 넘어 어느 수레에 진시황이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위병이 가장 많은 가운데 수례에 진시황이 있을 것이니 죽이라고 하였다.


 창해역사가 날아가듯이 가운데 수레에 가서 수레에 타고 있는 사람을 죽이고 무사히 탈출하여 나왔다. 아무튼 우리나라에서 힘센 장사가 강릉에 있더란다.  

   

창해역사 설화 2     


강릉 남대천에 큰 두레박이 떠내려오는 것을 어느 노파가 발견하여 건져서 보니 얼굴빛이 검은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가 창해역사다. 장량이 진시황을 죽일 장사를 구하려 강릉에 왔다. 얼굴이 검어 여씨라고도 하며 예국의 평민이다.        


강릉지역의 창해역사 설화에서 중국인과의 교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중국과 교류가 지형상 멀고 험하여 없었을 것 같은데 중국인과 연계된 설화가 있으니 이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또 강릉지역에 대한 다른 이야기도 있다.     


이 지역에 예족(한민족 원류의 한 갈래)이 만든 조그마한 국가가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 시기에 이 지역을 지배하는 부족장이 고조선을 버리고 중국 한나라의 무제에게 귀순하여 창해군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또 몽고가 중국 남송을 멸망시키고 남송 군인 포로들을 강릉 양양지역으로 이주시켰다는 주장이 있다. 강제로 이주한 이들은 고향 생각에 사무쳐 자기들이 살던 지역과 자연환경이 유사한 곳에 자기네 고향의 지명을 이식하여 불렀다고 한다.    



  

설화로 강릉지역 어루더듬기     


전문가의 견해이다. 중국 대륙이 진시황에 의한 통일과 멸망 그리고 한 제국이 등장하는 짧은 기간의 거대한 변화과정에서 중국 동북부 지역의 한족이 동란을 피해 요동과 한반도로 이주했고 황하 이남 회수지역의 종족이 바다를 건너 한반도로 이주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피난한 사람들이라 중국 대륙 지배층에 대한 보복심리 있었는데 여기에 사마천 사기의 장량 이야기를 가져와서 창해역사 설화를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나의 짧은 생각


우선 글자의 뜻을 풀어본다. 창해(滄海)의 뜻이 넓고 큰 바다(국어사전), 큰 바다 또는 신선이 사는 곳(옥편),  큰 바다 또는 동해의 별칭(바이두)이라 설명되어 있고 역사(力士)의 뜻은 뛰어나게 힘이 세고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사람(국어사전, 옥편)이라 풀이되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강릉이 예족의 중심지라는 표현과 중국 한무제의 창해군 설치기록 그리고 남송군인의 집단 이주 이야기 등을 어루만져 보면  


창해의 위치는 서울등 서쪽에 있는 사람들이 동쪽 멀리 바다가 있는 강릉지역(삼국시대 이전부터 동해안 지역의 중심지)이고 창해역사는 특정인이 아니고 똑똑하고 힘이 센 사람들을 지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원전에 강릉지역과 중국과 교류가 어떤 식으로 어떤 내용으로 있었는지 짐작이 되지는 않으며 남송의 군인을 왜 강릉지역으로 이주시켰는지도 의아하나,  


아주 먼 옛날 강릉지역은 한반도 중심 지역의 사람들과는 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자기들만의 문화를 가지고 살았는데 똑똑하고 힘이 좋은 이들은 지역의 변화와 발전을 위해 뭔가를 도모하였고  그래서 그런 일을 오래 기억하려고 장량의 의로운 행위를 빌려와서 함께 버물려 설화를 만들었을 수도 있겠지.    


영월 지명


위 설화는 영월지역에서 채집된다.  지명은 백월(백제), 내성현(고구려), 내생군(신라)이라 하다 고려 때 영월로 개명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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