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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해영 Jun 05. 2024

억누르면 반발심만 커질 수 있어
(청태종 설화)

         

청태종 또는 홍타이지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분노, 슬픔, 안타까움 등의 단어가 떠오른다. 왜냐하면 그와 함께 생각나는 우리의 역사는 남한산성의 병자호란, 인조의 삼전도 항복 의식, 노예로 끌려간 수십만 명의 백성 등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만든 청태종의 설화 한편이 경북 봉화에 전래한다.     


청태종의 조상묘 찾기 설화


봉화군 봉화읍에서 내성천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삼계리라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서 두 계곡의 물이 합류하여 쌍계라고도 한다. 남한산성 싸움이 조선 임금의 항복으로 끝나고 청나라 관리들이 한양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청나라 태종의 편지를 내놓으며 태종의 조상 묘가 태백산 남쪽 내성현 쌍계에 있다 하니 알아봐 달라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안동부사에게 사정을 알아봐라는 지시를 내렸다. 부사는 청나라의 보복이 두려워 쌍계라는 지명은 없고 삼계라는 지명이 있다고 사실을 숨기고 보고했다.


천자를 낳았다는 묘의 이야기는 조선 초기로 올라간다. 이 씨 성을 가진 가난한 화전민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상을 당했으나 가난하고 또 춘궁기라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노승이 삼계리 마을 뒷산에 묘터를 잡아주면서 하는 말이 “오늘 장례를 지내고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나 중국으로 가서 살되 고향을 잊으라. 벌초는 걱정하지 말라”하였다. 

   

이 부부는 노승의 말대로 이행한 후 만주에 가서 살았다. 노승은 마을을 떠나면서 “새로 생긴 묘소의 벌초를 하면 아들을 날 수 있다” 고 동네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과연 노승의 말대로 아들 낳는 영험을 보자 묘소의 벌초는 아들 낳기를 원하는 동네 주민들이 함이 관행이 되었다.


그리고 만주로 떠난 이 씨 성의 화전민의 후손이 청태종의 아버지인 누르하치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봉화 사람들은 이 묘소를 ‘하니네 묘’라고 부른다. 청의 임금을 여진족의 말로 칸이라 하는데 우리말로 한이라 읽는다. 그리고 청태종을 비하하여 ‘한니네 묘’라고 부르던 이름이 지금은 하니네 묘라 불린다.          

설화를 이해하기 앞서


설화에 대한 보편적 견해


설화는 말과 이야기기의 연출을 통해 만들어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펴져 세력을 얻으면 후대에 전승된다. 인물 설화는 전승되는 인물이나 인물에 관한 이야기로 마을이나 지역 공동체의 문화자원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청태종이 봉화지역이나 지역 공동체에서 어떤 문화자원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봉화라는 지명


봉화의 뜻은 ‘백성은 왕을 받듬에 즐거움이 있다’라는 의미이다. 물론 중국 절강성에도 봉화라는 지명이 있다. 이 지명은 한족들이 북쪽의 유목족에게 쫓겨 살기 좋은 황하유역을 버리고 환경이 열악한 장강 이남으로 근거지를 옮긴 남송 시절에 개명된 이름이다. 양 지역의 지명이 한자와 뜻이 똑같다, 봉화군의 지명은 신라 경덕왕 시절에 옥미현이라고 한 이름을 고려왕조에서 봉화로 바꾼 것이다.     

 

봉화지역은 산이 많고 교통이 열악한 오지라서 해방 이후까지도 산적이 출몰하여 곡식이나 차량 절도가 있었을 정도로 국가의 행정력이 덜 미친 지역이었다. 또한 경북의 여타 지역과는 다르게 반골 기질이 강하고 선거의 경우에는 비주류성향의 특징을 가진다.     

 

신라 진흥왕이 551년도에 한강 상류인 고구려 영역의 땅을 빼앗았는데 그 규모가 신라 본토보다 넓은 지역이었고 시간도 1년 정도였다. 그 후 신라의 국토 개편 때에 삭주라는 이름의 지방 행정구역을 설정한다. 삭주의 영역은 철원에서부터 봉화지역까지 태백산맥의 서쪽을 따라 길게 분포했다. 


이 지역은 삼한시대에 맥족이 고구려에 밀려 중국의 요하지역에서 유입되었다고 하며 또 말갈족이 살았던 지역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조정이나 지역사회의 지배층에 반대하는 경향이 많아 지배층을 잘 따르라는 희망이 지명에 숨어있다.     


설화 이해하기      


왜 봉화에 청나라 태종의 조상 찾기 관련된 설화가 있는가.          


일반적으로 설화는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럼 청태종 설화도 그러할까? 청태종의 우리 겨레에 행한 악행을 고발하고 복수하기 위해서 청태종이 그의 조상 묘를 찾으려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의미라고 이해해야 할까?     


나는 조금은 다르게 보고 싶다. 즉 청태종은 우리의 설화층이 내세우는 표면상의 행위자에 불과하고 이들이 못마땅해하는 계층은 따로 있다고 본다. 그래서 청태종을 그 당시 조선 사회의 주류층으로 바꿔서 이해하면 어떠할까 한다.


청태종을 인조와 그의 정권을 만든 공신들로 대체해 보자. 그들은 기존의 강대국인 명나라와 신흥 강자로 부상하는 청나라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광해군을 몰아냈다.


그리고 명분에 집착하여 명나라만을 떠받들기와 수신제가한다는 주자학을 배웠으나 사리사욕과 당파싸움을 일삼는 조정 대신들의 행태 그리고 말로는 성리학자임을 앞세우고 실학과 실속을 외며하는 지역사회의 양반들의 모양을 비판하고자 이런 청태종의 설화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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