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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해영 Jun 12. 2024

잘난 친구를 출세 장애물로 여긴
결과(손빈방연 설화)


직업을 가지기 위해 우리는 뭣인가를 배운다. 이 길에서 같은 뜻을 가진 학우끼리 격려와 경쟁을 하면서 배움 길의 어려움을 헤쳐나가며 그런 와중에 우정이 쌓이기도 하며 배움을 마친 후 회사를 찾아 취직하고 승진도 한다.


 그러다가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함께 공부하던 동창과 경쟁을 벌일 수 있다. 이때 서로는 선의의 경쟁만 할까? 경쟁이 격렬해지면서 상대를 헐뜯고 모함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다가 정도가 심해지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여기 동창을 출세의 장애물로 여긴 결과 목숨까지 내놓은 사례를 이야기한다.     


설화 내용


손빈과 방연이 귀곡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는데 어느 날 선생이 숙제를 냈다.

 “방안의 나를 밖으로 나가게 하면 상을 주겠다.”


방연이 먼저 대답을 하였다. “공부방에 불을 내면 뜨거워서 나갈 것입니다.”

아무 말이 없는 선생이 손빈에게 물으니 의견이 없다고 하였다.

“단 밖에 있는 선생님을 방안으로 청할 수는 있습니다”.

할 수 없이 밖으로 나온 선생님은 본인을 방 안으로 보내라 하자.


손빈, “이미 의견을 냈습니다.” 

선생,  “어! 저놈에게 속았네.”     


두 사람은 계속 공부하여 선생님의 지식을 거의 습득하였다.  방연은  이 정도의 실력이면 좋은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다 생각하고 선생 곁을 떠나 낙양부근에 있는 위나라로 항하였다. 


그러나 손빈은 떠나지 않고 더 배워 병법의 비결도 익혔다. 손빈이 하산할 때 선생은  그에게 과거를 보지 말라고 조언하였다. 손빈이 떠날 때 선생은 음부경의 마지막 장에 ‘위험, 손바닥, 齊字, 발바닥, 風字, 미친 체’라는 글귀를 써줬다.     


방연이 위나라에서 대장군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손빈은 그를 찾아갔으나 오히려 방연의 모함에 걸려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또 도망을 못 가게 무릎 연골을 빼어 몸을 망가뜨려 버렸다. 감옥에 나타난 방연은 장애인이 된 손빈을 보자 통곡하면서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심복을 곁에 두고 손빈을 보살펴주라고 하였다.


방연의 흉계로 험한 꼴을 당하고 또 손빈의 병서를 얻고자 심복을 곁에 두게 한 줄도 모르고 오히려 선생에게 배운 전쟁의 비결을 방연에게 주려고 책을 만들었다.  이때 손빈의 인격에 반한 옥졸이 방연이 자기의 자리를 빼앗길까 봐 병신을 만들었으며 보살핌은 병서를 얻어내기 위한 흉계라고 폭로하였다.      


손빈은 스승의 글귀가 생각나서 병서를 태우고 미치광이 행세를 하였다. 방연은 진짜 미쳤는지를 시험하고자 손빈을 돼지우리에 가뒀다. 손빈이 돼지똥을 먹는 것을 보고 틀림없이 미쳤다고 여기고는 내버려 둬도 미치광이로 살다가 죽겠다고 생각하고는 내다 버렸다. 


마침 위나라에 온 제나라 사신이 손빈의 관상을 보고 머리 좋고 쓸만하다 여기고 제나라로 데려갔다.     


손빈과 방연의 관계성   


손빈과 방연은 한 스승밑에서 공부를 한 친구였으며 공부할 때 결의형제를 맺고 먼저 출세한 사람이 추천해 주기로 언약하였다. 그러나 먼저 출세한 방연은 손빈이 자기보다 뛰어나 자리를 뺏길까 봐 모함하였으며 손빈도 나중에 제나라에서 출세하였다. 


이리하여 두 사람의 사적 원한이 가미된 위나라와 제나라의 큰 싸움이 벌어져 방연은 손빈의 계락에 빠져 죽고 손빈은 일약 대스타가 되었으며 위나라는 전국시대 최강국의 지위를 잃고 말았다. 


그럼 손빈의 삶은 어떠했을까? 손빈의 사망 기록과 묘는 찾지 못하고 있다. 1970년대 산동지역에서 손빈의 아버지 묘지석이 발견되었으며 인근 동네에 손 씨 사당과 손 씨 후손이 살고 있었다. 손빈은 방연의 위나라를 크게 무찔러 아주 유명해졌으나 제나라의 정치싸움에 뛰어들어 패배하였으며 그의 마지막은 비참했을 거라 한다. 그리하다 보니 죽음의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왜 제주에 이런 설화가 전해올까?


제주도가 우리 땅이라는 인식은 오래되지 않다. 1105년 고려 숙종 임금 때 탐라지역을 직접 관할하였으나 곧 몽고의 직할령이 되었다가 나중에 고려에 환원되어 그제야 우리 땅으로 여기게 되었고 제주 지명은 고종 때 정해진다. 탐라는 깊고 먼바다의 섬나라 뜻이다.      


 왕조시대에 육지의 사대부들은 제주도를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바다를 건너야 하는 아주 먼 곳이며 문화를 누릴 수 없는 낙후된 곳으로 여겼을 듯하다. 그래서 제주도로 근무 명령을 받으면 좌천됐다고 여기거나 심하면 유배 가는 것 같은 인식을 하였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유배지는 245곳이며 유배인은 700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중 260여 명이 제주도로 귀양을 갔으니 숫자만으로도 대표 유배지였다.


유배인은 글공부를 많이 한 사대부였을 것이며 막상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떠올랐을 것이다.  인생 역정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유배 원인의 상당 부분이 같이 공부한 동료의 모함이나 경쟁에 밀려남 등으로 정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비참함과 복수의 생각에 자기를 이렇게 만든 동료나 친구의 뒷 끝이 어떻게 되면 마음의 위안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도 하였을 것이다.     


친구나 동료를 출세의 장애물로 여긴 육지의 승리자에게 앙갚음을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손빈과 방연의 이야기는 이런 마음을 대변해 주었을 것이며 주변 토박이들에게 신세타령과 억울한 마음을 담아 이야기하다 보니 호응을 얻게 되었으며 주변으로 퍼져 설화로 남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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