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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해영 Jul 10. 2024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송태조 설화

임천 조 씨가 벼슬을 하게 된 사연(설화)


임천 조 씨는 강감찬 장군 휘하에서 무관으로 있으면서 큰 공을 세워 임금님으로부터 가림백(伯, 높여 부름)이라는 칭호와 땅을 받아 큰 부자가 되었다. 무척 부자라 쌀 이만 석 임천 조 씨라고 불렸다. 사실 조 씨는 중국 송나라 태조의 후손으로 나라가 망하자 고려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후에 임천 조 씨의 후손이 전라 감사가 됐는데 임천 조 씨들이 부자이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있어 ‘아,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누군가를 출사 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고모를 대원군 집으로 시집보냈다. 


그래서인지 조 씨 아들이 명예직으로 사천 현감을 3년 하다가 정읍 군수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였다. 군청에 와보니 재정이 바닥나 있고 객사와 동원이 낡아 비가 새 사재로 보수하였다. 나중에 초상이 났을 때 많은 조문객이 왔다.


설화에 상상과 창의 더하기


대부분의 삶에서 돈을 가지면 권력을 탐하고 더 나아가 명예까지 가지려 한다. 그러나 오히려 가진 것을 잃어버리거나 심하면 목숨까지 내놓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편법과 욕심이 발동하여 나쁜 짓으로 주변인과 동동체에 피해를 줘 복수를 당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설화에서는 이만 석이나 되는 부자가 권력을 탐하지 않는 생활을 하다 관계 맺기를 잘하여 큰 권력자의 도움을 받아 관직을 가지게 되었으나 업무를 빙자하여 부를 도모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지역사회에 투자함으로써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은 더 가지려 하지 말고 가진 바를 잘 사용함으로써 모두를 가지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상당한 숫자의 외국인 살고 있다. 이들은 우리가 하기 싫어하는 분야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일을 하며 우리의 사회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고 이들도 제대로 된 평가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없다면 우리 사회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될 여건임에도 우리는 이들을 도외시하고 있다. 위 설화에서도 고귀한 신분임에도 그리고 나라를 위한 싸움에서 공을 세웠음에도 그 당시 서울인 개경이나 황해도 부근이 아닌 나라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살아가게 한다.     


그 당시에도 외국인에 대한 좀 다른 시각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고 있다. 이제는 외국인에 대해 가슴을 열고 좀 포용적인 자세로 그들을 받아들여 우리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게 배려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설화와 사실 


설화는 장소와 시간을 특정하기 어려운 옛날 옛적의 재미와 의미가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송 태조 설화는 내용이 거의 사실과 부합된다. 


우선 중국 송나라 태조 조광윤의 증손이 송나라 황실의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피해 고려로 망명을 하였다. 그는 개명하여 고려로 왔으며 부여군 임천면에 정착하여 살았고 감강찬 밑에서 거란군을 격파하는데 일조를 하여 임천지역을 봉지로 받았다. 그의 후손이 정읍군수가 되어 군청을 사비로 보수하였다고 한다.    




지명 이야기


이 설화가 채집된 지역은 전북 익산이고 조 씨 조상이 살았던 지역은 임천으로 서로 가깝다. 이 두 지역은 조선왕조의  고려 색깔 지우기에 의해 지명의 격이 하향 조정된다. 임천(林川)은 백제 시기 가림(加林)이라 했는데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 가림(嘉林)으로 개명을 하였다.


 가(加)는 더한다는 의미이고 가(嘉)는 아름답다 경사스럽다의 뜻으로 통일신라 시기 문화 수준이 높아져 고급 한자와 한문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임천은 고려 시기 주(州)나 조선 초기 부(府)의 역할을 하였는바 주나 부는 지방의 중요지역에 설치한 것으로  왕조에서 임천을 상당히 우대하였다는 증거이다.      


공교롭게도 고려시기에는 원나라 고관의 처 고향이었고 조선초기에는 이 지역 출신이 명나라에서 환관으로 활동하였다.     


익산은 백제시기에는 소력지현(所力只縣)이라 했는데 경덕왕 시절 옥야현으로 개명된다.  고려 때 익주(益州)라 했다가 조선 태종시절 임천의 경우처럼 산(山) 글자를 사용하여 익산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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