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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해영 Jul 24. 2024

이곳 귤이 저쪽에선 탱자가 된다
(안영 설화)

사람은 주변 사람들과 호흡하면서 성장한다.  그런 와중에 타고난 소질을 계발하여 본인의 발전과 사회에 기여하면 더할 나위 없이 보람찬 인생이 될 것이다. 수준 높은 말재주도 연마되면 멋진 삶을 살 수 있다.


  이런 재주를 가진 사람은 모임방에서 대화의 주도자가 되어 더욱 재능을 닦게 되며 사회에 나아가서 그가 속한 사회집단을 위해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물의 설화가 함평에 전래한다. 이 설화의 중심어는 못생김, 언변이며 설화의 주제는 재주도 환경의 영향을 받아 자란다 이다.    

 

강남의 귤이 강북에서 탱자가 되다(설화 내용)   


이 이야기는 우리가 저 방에 앉아서 들었는데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안영이라는 사람이 초나라의 왕에게 했던 말재주 이야기이다. 안영은 키가 아주 조그마하나 말솜씨는 매우 비상해서 유명세를 탔다. 

그러자 초나라 왕이 조그마한 사람이 재주가 있다면 얼마나 있겠냐며 그를 시험해 보려고 초나라로 불렀다. 


왕을 만날 때 안영은 제나라 사람을  줄로 묶어서 데리고 갔다.  초나라 왕이 안영을 직접 보니 정말 작았다. 그래서 말을 하기를


 “귀국에는 사람이 없소?” 안영이 알아듣고 말하길  “왜 사람이 없어요. 우리나라에는 걸어 다닐 때 서로 어깨가 부딪혀서 못 다니고 발이 밟혀 다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당신처럼 작은 사람이 왔소?”


 안영이 답하기를, “우리 제니라에서는 타국에 사신을 보내게 되면 그 나라가 큰 나라인지 작은 나라인지 따져 보고 그 나라에 맞는 사람을 보냅니다” 하였다.     


초나라 왕이 그다음 질문하기를 “왜 사람을 묶어왔소? ” 그러자 안영이 답하기를 

 “도둑놈입니다”. 초왕이 말하길 “제나라 사람들은 죄인이 많구나! 귀국은 남의 것만 탐내고 도적질로 먹고살아서 사람들이 도둑질만 합니까?”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제나라는 내 자력으로 벌어먹고 사는데 초나라로 데려다 놓으니까, 초나라 사람들의 물이 들어 도적질을 합니다.”  사람이란 환경의 받지 않습니까?     

 

설화 카페 그리고 전파


이 설화를 구연자가 사랑방에서 들은 거라 하면서 이야기를 꺼낸다. 예전 시골에서 농한기에 접어들면 동네의 한량들이 분위기 좋은 사랑방에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 늘어놓거나 야식 내기 놀이도 하며 재미있는 한때를 보냈다.


 이때 말재주가 좋고 얻어듣거나 읽은 거리가 있는 한량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대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이 사랑방은 일종의 설화 카페 같았다.     


그런데 이런 설화가 어떻게 함평에서 수집이 되었을까?     


 이 설화의 주요 내용은 중국춘추전국시대의 산동지역에 있었던 제나라의 안자라는 뛰어난 정치가의 이야기로 상당 부분이 실제의 있었던 내용을 설화로 채용하고 있다. 안영의 이야기는 동주열국지 등의 중국 소설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고 본다.


 이 소설은 한자로 쓰였으며 조선 말기에 접어들면 한글 번역본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 소설을 보는 계층은 서울에 사는 양반집 한량이나 부잣집 여인들이 주요 독자였다. 사회의 주류인 사대부들은 소설을 삶에 백해무익한 잡서로 취급하여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고 가족에게 읽지 못하게 단속도 하였다. 


그렇다고 일반 평민은 책을 보고 싶어도 책을 빌릴 돈이 없거나 시간이 없어 이런 책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어떤 사대부 집안의 입심 좋은  한량이 이런 소설의 재미에 빠져서 몰래 보다가 아버지나 형의 책망을 받고 기분도 풀고 여행도 할 겸 시골로 간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 한량이 그곳의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했을까 아니면 부잣집 아가씨가 시골로 놀러 가서 이야기를 전하였을까?  하여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함평에 안영의 설화가 있게 된 연유가 긍금하다.      


함평지명 이야기


지금의 함평은 조선 태종 시기 함풍현과 모평현을 합병하여 하나의 지방 행정구역을 만들 때 한 글자씩 취하여 함평현이 되었으며 이 지명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함풍현은 백제 시기 굴내현(屈乃縣)이라 했는데 통일 후 군나(軍那)로 불리다 경덕왕 때 함풍으로 개명을 한다. 모평현은 백제 때 다지현(多只縣)이었으나 경덕왕 때 다기현(多岐縣)을 거쳐 고려 왕건이 모평현(牟平縣)으로 바꾼다.       


즉 함평지역은 백제 시기 1개군과 2개 현이 있었는데 멸망 후 신라는 군지역은 별도의 행정구역인 무안군으로 독립시키고 남은 두 개 현을 하나의 현으로 합쳤다. 이는 이 지역의 힘을 약화시켜 중앙의 통제가 쉽게 하려는 의도가 있어 보이며 조선 때 2개 현을 하나로 병합함은 이제 중앙에서 관리의 자신감이 반영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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