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을 이름 짓다 2-10)
조선 태종 이방원은 고려 왕조의 지방행정 단위를 개편하면서 군현의 개수를 대폭 축소하였다. 504(군현 130 속현 374) 군현을 330개소로 줄이고 모든 군현에 중앙정부의 관리를 배치했다. 고려의 경우 중앙에서 직접 관리한 지역은 전체 군현의 1/3 정도이었고 2/3 지역은 관원을 파견하지 않고 지방 호족에게 맡겼었다.
지방행정의 책임자는 부윤(종 2품), 대도호부사(정 3품), 목사(정 3품), 도호부사(종 3품), 군수(종 4품), 현령(종 5품), 현감(종 5품) 등 계급이 다양하였다.
군현 330개소 중에서 군 이상은 읍(邑)이 있었으나 현(縣 현감 파견) 140 개소는 읍이 없으며 규모도 10배~20배나 작아 큰 면(面) 정도였다.
행정단위 줄이는 방법으로 고려 시기 승격한 군현을 호구(戶口)•전결(田結) 수에 따라 하향하였다.
호구:부부와 자녀 노비 숫자, 3년마다 조사, 전결수:측량한 토지 수치, 세금 징수에 사용, 20년마다 조사
이와 반대로 군현의 등급과 명칭을 승급도 하였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조건은 호구수이었는데 1,000호 넘은 군(原平·密陽·善山·平山·春川·肅川)은 도호부로 1,300호인 대구현(大丘縣)은 군으로 승격(세종)시켰다.
태종의 지명 개명
고려 시기 왕조에 공헌을 세웠거나 중요한 군현을 주(州)로 승격하였는데 이들을 중점적으로 위계를 낮추고 지명을 개명하였다. 1413년 태종 13년 부윤, 부사, 목사 계급이 임명되고 있는 소규모 주(州)의 지명을 산(山)이나 천(川) 글자로 교체하였다.
개명 대상은 총 59개소(천 36, 산 23)이었는데 괴주(槐州)→괴산, 곡주(谷州)→곡산, 제주(堤州)→제천, 신주(信州)→신천이 대표적이며 이들 지역 책임자의 직급을 낮춰 군수·현령·현감을 파견하였다.
천으로 개명 개소수 : 평안 11, 충청 7, 경기 5, 경상 5, 황해 3, 영길 3, 강원 2, 없는 곳 - 전라도
산으로 개명 개소수 : 평안 9, 충청 5, 경상 3, 전라 3, 황해 2, 영길 1, 없는 곳 - 강원, 경기
이들은 고려 때 보다 지명 정책에서 낮은 대우를 받은 지역이며 특히 평안도의 개명 지역은 20개소로 전체 59개소의 34%에 이른다. 고려의 고구려의 계승자 인식과 북방족과의 전쟁 수행을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고려왕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개명도 있었는데 고려왕조 시절 왕비를 12명 배출한 인주를 인천으로 바꿨음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규모가 큰 주나 군의 경우 산천 글자로 바꾸지 않고 목사·대도호부사를 파견한 경우도 있었다.
양주→양양, 귀주→귀성, 청주(함경도)→북청, 녕산→천안, 보령→보은, 횡천→횡성
또한 군현을 합병할 때 등급의 고하(高下)가 있는 경우 상위(上位)의 명칭이 하위에 우선하였으며 같은 등급끼리 합쳐 지명을 개명할 때 합쳐지는 군현에서 한 글자씩 채용하였다.
그러나 첫 글자를 어느 글자로 배치할 것인지로 경쟁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덕은(德恩)과 시진(市津)을 통합하여 덕은이라 하려 했으나 시진 현민이 항의하여 은진으로 하였고 비옥(比屋)과 안정(安貞)을 안비로 명명을 하려다 비옥 현민의 항의로 비안현으로 정하였다.
질박한 속명을 한자로 아화(雅化 예쁘게 하기)하였으며 발음상 비슷한 한자를 혼동되지 않게 하는 개명도 있었다.
의미를 살펴보면 산천은 산과 내 산하는 산과 큰 내라고 국어사전에 설명되어 있다. 중국 측 해석은 산천은 자연경관을 표현하는 일반적인 단어이며 산하는 대자연 특히 산맥과 강의 웅장하고 위대한 경관의 표현으로 고대에는 태산과 황하를 지칭하였다.
규모로 보면 강과 하는 비슷하며 다음이 천이며 그다음이 계 마지막이 곡이다. 천은 개천인데 강의 본류로 흘러 들어가는 지류(支流)이다. 계(溪)는 개울 곡(谷)은 골을 뜻하는데 계는 곡보다 큰 지천이며 산에서 발원하여 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참고로 우리는 하를 잘 쓰지 않는다.
산천(하)은 산과 강이지만 자연과 자연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으로 우리가 자연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방식에 대한 관념도 내포하고 있다.
그러면 산과 천을 어떻게 구분하여 지명에 사용하였을까? 우리나라는 산이 약 67%를 차지한다. 산이 많으니 산과 산 사이에 계곡이 생기고 그 계곡에 계와 천이 형성되어 자연스럽게 강으로 바다로 연결된다.
사람이나 물자의 내왕을 위해 산자락에 길을 내기는 상당히 어렵고 관리도 곤란하여 자연히 물길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길은 좁고 험해 마차 이용이 제한적이어서 많은 물량은 천을 이용하여 강으로 바다로 운반했다. 세금을 운반하는 통로도 강과 천이 사용되어 여기에 부합되게 군현의 경계를 삼았다.
이러한 사유로 개명은 신라 고려에도 있었을 것이나 조선에 들어서서 확실한 중앙집권제로 지방행정에 대한 자신감 커서 이전 왕조와는 다르게 물길의 경제적 이용효과를 중시한 개명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개명 대상 군현의 치소가 있는 땅이 물에서 가까운 곳에는 천(川) 자를 산이 많은 곳에는 산(山) 자를 붙이는 식으로 바꿨을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명에는 자연지리뿐만 아니라 인문지리도 스며 있는 일종의 문화재라고 할 수 있는바 자연지리를 나타내는 산과 천 두 글자만으로 개명함은 지명이 품은 역사와 문화를 소홀히 하였음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