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지명으로 야기되는 주장 4-8)
신라 경덕왕이 757년 전국지명 450개소를 한꺼번에 중국식으로 바꿔버렸다. 이 중에서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지명은 75개소로 전체의 20% 정도이다. 물론 남한 내 통계이며 이 중에서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지명은 36개소이다. 햇수로 1268세를 살고 있는데 오랜 생존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75개소 지명을 개략적으로 지도상에 펼치면 강원도 동쪽지역(신라시기 명주)과 경상도 낙동강 좌측지역(강주)은 생존율이 평균에 비해 2배 높으며 서울 경기도와 강원도 영서지역(신라시기 한주 삭주)은 평균의 1/10 정도로 매우 낮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낙동강 우측지역(신라시기 웅주 무주 전주 양주)은 평균과 비슷하다.
이를 삼국시대 이전 국가영역으로 살펴보면 마한 지역과 가야지역에 비교적 많으며 강을 기준으로 잡으면 섬진강 영산강유역에 많고 한강유역은 매우 작다.
마한과 가야는 강과 바다를 활용하여 생활하는 여러 소국들이 서로 느슨한 연대로 이뤄진 나라 연합체 성격이었다. 이들은 고려 조선에 들어서도 중앙세력에 기댈 부분이 많지 않고 자급자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역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강릉을 중심으로 한 지역도 소국형태의 나라들이 삼국초기까지 있었으며 통일신라 시기에도 자치권이 작동하던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이 신라 왕조의 중국식 개명에 덜 부정적이었을까?
이들 오래된 지명의 생존력은 중국 지명 닮기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 수 있을지? 경덕왕의 개명을 형식면에서 살펴보면 중국 지명의 형식 따라 하기이다. 그러나 내용면에서 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즉 가장 많은 개명은 우리말 지명을 유사한 음이나 의미의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전체 지명의 50%나 차지한다.
중국 역사문화를 본받았다고 볼 수 있는 지명은 약 25%로 모방내용은 유교사상 중국고전 중국연호 성어등이다. 이들은 한자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진 문화부호였다.
외견상 중국식 지명이나 내용명에서는 절반이 우리 지명의 고유성을 살리며 수준 높은 한자로 바꿔 표기한 것이고 중국문화를 모방했다고 여길 수 있는 부분은 1/4에 불과하다. 따라서 1268년 된 지명의 생명력이 중국 따라 하기에 이유가 있다고 봄은 지나치다.
우선 개명 시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백제는 660년 고구려 668년에 망했지만 신라 당나라의 전쟁이 일어나 676년에 전쟁이 멈췄으나 휴전상태가 지속되어 736년에야 정식으로 전쟁이 끝났다.
종전 바로 전 735년 신라의 영토 영역이 대동강 이남까지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진정한 통일국가 시기는 736년부터 나라가 망한 935년까지 약 199년으로 볼 수 있다. 이 기간 중에서 성덕왕 경덕왕이 있다.
성덕왕 때는 당나라의 문화 닮기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는데 재위 30년에 견당시를 46회나 파견할 정도로 당나라와 친교 맺기에 적극적이었다. 그런 노력과 국제정세 변화 덕분에 신라는 예성강 이북에서 대동강 이남 땅을 정식으로 인정받아 명실상부한 영토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당나라와 관계가 정상회되어 국토도 넓어지고 당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문화도 매우 융성하였다.
성덕왕의 후계자인 경덕왕은 즉위 후 다년간의 준비를 거쳐 757년 지명을 개명하였는데 이는 전쟁이 멈추고 81년이 지나고 진정한 통일이 된 후 22년을 맞이한 시기이었다.
따라서 경덕왕의 중국식 개명이 있었던 때는 전쟁의 흔적이 옅어지고 삼국 사람이 하나의 국가체제에서 생활하며 삼국시대 옛 분위기가 찾기 어려운 분위기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정치적 목적으로 지명 개명을 추진하여 목적 달성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두 번째로 마한 가야 지역의 특징이다. 마한은 경기 충청 전라도 지역에 있던 수많은 소국 연합체의 대표였다. 나중에 백제가 강력해지면서 마한은 약해져 가고 권역도 대폭 축소되었다. 그러나 전남지역 특히 영산강 주변의 마한은 여전히 3세기까지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며 나라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백제의 최전성기인 근초고왕 시절에도 백제는 이들을 간접지배형태로 관리하였을 뿐이다. 여타 마한 지역이 이미 백제 영역에 편입되어 백제의 직접적인 관리를 받고 있었음과 다르게.
그러다가 무령왕 시기 523년이 되어 백제의 직접 지배로 성격이 바뀌었다. 이는 백제 멸망 660까지는 불과 137년 전으로 마한의 지명 생명력이 백제의 지명 장악력에도 나름 그 힘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백제 멸망 후 97년이 지나 통일 신라의 문화 흥성기에 개명되었음을 고려해 보면 백제 지명의 영향력보다는 마한 지명의 힘이 여전히 존중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음 가야지역이다. 김해지역의 금관가야는 가야세력의 첫 번째 대표이었다. 그러다가 경주의 신라세력과 정복이 아닌 연대로 신라에 편입되었다. 즉 금관국의 왕이 신라의 상대등을 역임하였고 이 왕의 아들 3명도 신라 최고 관직을 받을 정도였다. 따라서 가야의 문화는 강제당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들 지역의 지명도 신라로부터 상당히 인정받았을 것이다.
또한 양산지역은 신라의 하주下州로 통일 신라의 수도권 역할을 하였으며 상上州인 상주에 버금가는 중요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금관가야 이후 대가야가 부상하였으며 중국의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낼 정도로 자치적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때 섬진강 유역의 남원 임실 여수 광양이 김해만을 대신하여 대외 교역 창구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안하면 가야지역의 지명의 힘이 상당히 유지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중앙정치무대에서 많이 떨어짐이다. 신라의 경주 고려의 개성 조선의 한양에서 전남과 섬진강 지역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그 당시 교통로의 중점은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지역이다 보니 이들 지역은 실제 거리보다 심리적으로 더 먼 지역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들 지역은 농업과 어업이 대부분으로 국가에 세금 징수와 부역을 부담하였지 중앙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경우는 적어 중앙정부에 기댈 부분이 많이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중앙정부 차원에서 지방을 강력하게 통제하기 위해 지명개명의 필요가 상대적으로 낮았을 것이다.
네 번째 공동체 건강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왕조시대 공동체는 지연 혈연 기반의 촌락사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
지명의 생명력은 공동체의 지속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오랜 세월 같은 지명을 사용함은 공동체가 건강하다고 할 수 있으며 공동체 활동이 활발할수록 지명이 널리 알려지고 사용되어 생명력이 강해질 있다. 그리하여 지명이 오래된 지역은 공동체의 건강도가 좋은 지역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