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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야 엄마는 나에게 아빠가 베트남전쟁에 파병되었다가 돌아왔다고 알려 주었다.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 남편과 남동생을 떠나보내고 네 자녀를 혼자 키웠다. 할머니가 아빠의 파병 지원을 끝까지 반대했지만 아빠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첫째 고모는 어린 시절을 전쟁통에서 보내다가 다쳐 경제 활동을 할 수 없었고, 둘째 고모가 식당에서 일하고 받아 오는 돈은 턱없이 적었다. 아빠와 두 살 터울인 막내 삼촌은 아직 십 대였다.
다낭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아빠가 죽을 뻔했다는 것도 엄마를 통해 들었다. 옆에 있던 한국 군인이 아빠를 구하려다 심한 부상을 입어 결국 한쪽 다리를 잃었다. 그의 한국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 둔 아빠가 귀국 후에 연락해서 꾸준히 소식을 나눴다. 그는 뒤늦게 결혼해 아이도 얻었지만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는 투병 중인 모친을 모시고 있었다. 이후 그는 돈이 되는 일을 닥치는 대로 했는데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쓰레기 속에서 폐지와 고철을 주워 판 돈으로 생활하다가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일을 전하면서 엄마는 내 손을 잡았다.
“그런 시절이었다고 안 하냐. 어떻게 해서든 하나라도 더 살았으면 됐다고. 그 전쟁터에서 그이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
아빠는 언제부턴가 조금씩 기억을 잃었고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엔 옆에서도 그 징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빠가 일본으로 일하러 떠나고 나도 전문대를 졸업해 취직하자 부모님은 두 분의 고향으로 이사했다. 그곳은 아빠의 어린 시절 기억과 달리 요양원이 많기로 유명한 도시가 되어 있었다. 엄마는 친척을 통해 집을 구했고 학원에 다니며 운전면허를 땄다. 친척들의 일을 거들며 농사를 배우다가 나중에는 땅을 빌려 고추나 양파 같은 작물을 키웠다. 아빠는 가까운 기억부터 지워 나갔지만 병은 느리게 진행되었다. 일상적인 일들이 조금씩 엇나가긴 해도 사는 데 큰 지장은 없다고 엄마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