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by 구기자
Cy Twombly, 'Bacchus Series'

나는 아주 작고 어두운 방에서 비명을 지르며 태어났다.

뜨겁고 축축한 그곳에서 나는 밖으로 터져나가고 싶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손가락질하며 비난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 시절 나는 거칠고 무례한 아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억지로 끌어내리곤 했다.


세월이 흐르며 나는 단순히 소리를 지르지만 않게 되었다.

때로 나는 내 모습이 파란 불길 같다 생각했다.

분명 내 얼굴은 차가운데, 내 안은 조용히 끓어올랐다.

때로 나는 나 자신이 싫었다.

서슬 퍼르게 벼르고 날을 세운 칼 끝을 나를 향하기도 했다.

때로 나는 패기 넘쳤다.

누군가의 부당함을 보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당신은 낮에는 나를 비난하지만,

밤이 되면 나를 끌어안고 자리라는 걸 안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되면 당신은 눈동자로만 나를 품겠지.

우리가 서로의 손을 잡고 비명을 지를 때면

내가 뜨거운 건지, 당신이 뜨거운 건지 알 수 없다.

내가 당신의 눈빛에 닿을 때마다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를 당신의 평온을 파괴하러 온 괴물이라 모욕하지만,

나는 당신 옆에 있고 싶다.


어느 날 얼굴이 노란 사내가 나를 부른다.

내게 더 나은 삶을 선택하지 않은 걸 비난한다. 강요한다.

내게 강요하는 길은 저토록 우아하고 먼지 한 점 없는데,

정작 내가 발을 딛고 선 길바닥은 왜 이토록 지저분한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걸었다, 계속 걸었다.

거리에는 나처럼 물을 수 없어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옆을 거닐던 어린 여학생이 태극기를 흔들다

군화에 짓밟혔다.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눈이 맑은 소년은

책가방을 멘 채로 민주주의를 위해 달려 나갔다.

나를 철부지라던 옆집 아주머니는 군인들의 총구 앞에서도

¹ 한 대기 주먹밥을 들고 섰다.

나와 술잔을 주고받던, 이제는 배가 나온 내 친구는

사무실 책상을 박차고 울부짖으며 광장으로 나왔다.


나는 이제 묻는다.

당신은 아직도 내가 부끄러운가?

하지만 내가 없었다면 당신은 납작 엎드린 채

비겁한 평화를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당신의 심장을 태우고,

당신의 목소리를 거칠게 만들었기에,

당신은 이제 5월의 금남로錦南路에서

가슴이 터질 만큼 부풀려 숨을 들이켜도 아무렇지 않다.


나는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나는 분노이다.



1. '한 대야 가득'이라는 뜻의 전라도 방언

작가의 이전글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