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호] '첫(처음)'
내겐 부모님께서도 간간이 안부를 물으시던,
첫 남자친구가 있다.
때는 바야흐로 x3년 전, 내가 고등학생이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에 종합학원이 유행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원은 소수정예(라고 적지만 그저 수강생이 적을 뿐인)로 운영되는 데다, 중학생일 때부터 같이 다녀 같은 반 아이들과 성별과 학교는 달라도 끈끈한 전우애를 다졌다. 그래서 좀 치사한 짓이지만 열람실에서 공부하는 성향을 가진 아이들끼리 도서관 자리를 잡아주기도 했는데, 아침잠이 많은 내가 특히 도움을 톡톡히 받았다. 그날도 시험기간이라 서로 자리를 잡아주자고 문자(메신저 따윈 없던 시절이다)를 주고받은 뒤 이불과 물아일체의 경지에 들어갔다.
지금이야 프라이버시 존중이라는 게 당연한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지만, 그 당시엔 부모와 자식 간에 프라이버시? 더구나 자식의 프라이버시? 우리 부모님께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ㅡ 방에서 몰래 전화 통화하는 걸 못내 못 견뎌 내 방문을 정성스레 들어내기까지 하신 분들이다 ㅡ 그날도 너무도 자연스럽게, 너무도 당연히 잠든 내 머리맡의 핸드폰의 문자를 엄격하게 검열(!)하시던 중, 어떤 남학생과 주고받았던 문자를 보셨다. 나로서는 뭐라고 주고받았는지 생각도 안 나지만 당시 여중, 여고를 다니며, 취미라고는 독서와 게임뿐인 내 연락처에 유독 돋보이는 남학생 이름만으로도 부모님으로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께서는 조용히 남학생의 전화번호를 이름과 함께 쪽지에 적어두기까지 하셨다고 한다.
며칠 뒤, 약속했던 주말이 되어 도서관에 가자 늘 그랬듯 내 자리가 잡혀있었고,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여기서도 이 아이의 성품이 돋보인다.)
대략적인 대화는 이렇다.
- @@ 학생 핸드폰인가요?
- 네. 그런데 누구시죠?
- 구기자 부모님인데. 자네..
우리 딸 좋아하나?
우리 딸 좋아하나??
우리 딸 좋아하나???
우리 딸 좋아하나????
우리 딸 좋아하나?????
오 마이가쉬!!!!!!!!
내가 이 대화를 본인의 입으로 전해 들었을 때,
나는 내 몸 전체가 부풀어올라 폭발한 뒤, 먼지 한 점 없이 사라지고 싶었다. 정말 문자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그와 나의 사이는,
그는 내 절친을 좋아했고, 내가 보기에도 그는 내 절친에게 어울릴 만큼 괜찮은 아이였다. 그와 나의 사이를 굳~이 설명하자면, 내가 그들 사이의 큐피드 역할마저 자처하는 사이였다. 그런 우리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고 갔겠는가. 그저 시험기간이니 서로 열심히 같이 공부하자는 내용뿐이었을 터였다.
그런데 대뜸,
나를 좋아하냐고요????
이 친구 대답이 더 대단하다.
- 아.. 네, 좋아합니다. 그런데 친구로서 좋아합니다. 구기자가 정말 좋은 아이라서 다 같이 친한 친구입니다.
너는..
정말 괜찮은 아이였다...
이성적으로 말고 인간적으로.
고작 열일곱 살의 남자아이가 부모님 뻘 되는 어른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이렇게 우아한 말솜씨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심성이 고왔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부모님께서 그의 가정교육 칭찬도 덧붙인 건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학창 시절 내내 인기가 지지리도 없어 연애라곤 한 번도 못해봤던 나는 나도 모르는,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인정하시던 내 인생 첫 남자친구가 느닷없이 17세에 생기게 된 사연이다.
생전 생각도 안 나다가 이제 문득문득 생각나는 이유는, 그렇게 번듯하게 자랄 수 있었던 아이의
부모님이 누구시니?
라는 의문 때문이다.
종종 행동거지가 바르지 못한 동네 아이의 뒤에 대고 '도대체 부모님이 어떻게 가르쳤길래..' 하는 속삭임을 들을 때마다 나 혼자 스스로 흠칫해진다. 내 아이도 혹시 저런 소리를 듣진 않을까, 나는 제대로 가르치고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이제 5학년으로 접어들면서 말투는 점점 능글맞아지고, 톡톡 쏘아붙이기까지 하는 아이의 행동을 보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도대체 어떻게 이 아이를 가르쳐줘야 할지, 어떻게 부모로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줄지, 그것이 올바른 방식인지마저도 처음 부모인 나로서는 너무도 혼란스럽다. 그래서 이제야, 정작 본인인 나는 인정한 적 없지만 부모님은 인정했던 내 첫 남자친구가 생각나는 이유이다.
"@@야, 잘 지내니? 너는 참 인간적으로(강조) 괜찮은 아이였다. 우연히 마주친다면 네가 참 반가울 것 같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네가 어릴 적 부모님의 교육관을 듣고 싶구나. 그럼 이 추운 겨울, 건강하게 나길 바란다."
- 너의 오래전 진짜 사람친구일 뿐인 여자사람친구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