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usb가 있습니다.
여느 usb와 다를 바 없이 생겼지만 딱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건 쓰기 전용이라 저장 데이터를 읽을 순 없다는 것이겠네요. 보통 usb는 기억하기 위해 저장하지만, 이 usb는 안전하게 잊기 위해 저장합니다. 내 머릿속에 두면 자꾸만 되새김질하게 되니, 일단 usb에 옮겨 담고 '이제 여기 들어갔으니 당분간은 생각하지 말자'라고 스스로와 약속하는 의식 같은 것이죠.
그럼 버리면 되지 않냐고요? 도저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감정일지라도, 그 또한 나의 일부이기에 쓰레기통에 바로 비우기에는 내가 너무 가엾고, 그렇다고 간간히 떠올릴 때마다 부끄러운 그 어중간한 온도의 기억들을 USB라는 차가운 금속 안에 가둬두는 겁니다.
이를 테면, 실패의 기억들 같은 거죠. 사람들은 성공의 기억은 sns에 화려하게 전시하곤 하지만, 실패의 기억은 어디에도 두지 못하고 마음 구석에 곰팡이처럼 피워두곤 합니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실패했던 기억들을 USB라는 물리적인 장치에 옮겨 담는 행위는, 지우기엔 그 실패조차 내가 통과해 온 시간의 일부라 차마 쓰레기통으로 직행시키지 못하는 그 애틋한 미련을 위한 것입니다. 특히 관계 속에서의 실패는 더더욱 쓰리기 마련이죠. 다시 열어볼수록 내용은 깨져 있고, 감정의 파편만 날카롭게 남아 있는 상태, 있지 않나요. 혹은 상처 준 말, 끝내하지 못했던 말들을 지우고 싶지만 좋았던 시절의 기억으로 붙잡아 끝끝내 버릴 수 없었던 마음, 가지고 있지 않나요. 실패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그 파일을 usb에 남겨두는 이유는 그 시절의 나를 잃고 싶지 않아서, 그때의 나마저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이 usb입니다. 다음에 쓸 일은 없지만, 내 삶의 밑거름이 될 일도 없지만, 그저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은 증명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패는 성공보다 늘 용량이 큽니다. 후회와 미련이 덕지덕지 덧붙여지기 때문이죠. 처음엔 가벼웠던 USB가 실패의 기억들로 꽉 차서 더 이상 아무것도 들어갈 자리가 없을 때, 역설적으로 이제 새로운 이야기를 써도 된다는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저 담아만 두는 것으로 마무리해도 좋습니다.
화면에 '모두 이전했습니다.'라는 문구가 뜨나요? 이제 비로소 usb를 매개로 내 머릿속에서 그리고 내 현재와 분리되었습니다! 손바닥에 닿는 usb가 차갑게 느껴지지만 그 차가운 온도로 내 안의 들뜬 감정을 잠재워봅니다. 그리고 다시는 열어보지 않을 기억을 서랍 제일 안쪽에 밀어 넣습니다. 마침내 나는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먼 훗날 먼지 쌓인 서랍 속에서 이 작은 조각을 발견한다 해도 나는 결코 컴퓨터에 꽂지 않을 겁니다. 그저 손끝으로 전해지는 무게감만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그 시절의 내가 얼마나 서툴렀는지, 그리고 그 서툶을 버리지 못해 얼마나 애틋하게 간직해 왔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