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군포효'를 보다
아무런 목적도, 계획도 없이,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러 나가듯 훌쩍 차에 몸을 실었다. 그야말로 섬광이 스치듯 결정한 터라 일행도 없다. 내가 발길을 향한 곳은 '대구 간송 미술관'이다. 현재 무슨 전시가 열리는지, 무얼 보겠다는 것도, 아무런 정보가 없는 이 상태가 오히려 전시에 오감으로 몰입하기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좋은 시작이다.
전시실 1은 그 어떤 전시실보다 유독 어둡다. 하지만 2도, 3도 아닌 1관이 어두운 것은 빛에 취약한 고미술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떠나 이 지긋지긋하고 평면적인 일상으로부터 경계선을 긋고 암전 속 이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긴장감을 준다.
나는 내게 감동을 준 것도 아니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다 알 만한 그림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님을 미리 말해둔다. 그럼에도 집에 오는 길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그림, 그것은 이의양의 '산군포효'이다. 제목만 들으면 험한 산세에도 눌리지 않는, 그야말로 산의 주인에 걸맞은 위풍당당하고 엄기가 서린 호랑이가 포효하는 그림이라고 예상할 것이다. 하지만 그림 속 호랑이를 보면,
왕방울만큼 큰 눈을 멀뚱히 뜨고 입을 벌리고는 있지만, 무엇인가 겁에 질린 듯 순하기까지 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이빨도 날카롭기는커녕 뭉툭하기까지 해, 포효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지만 정작 마주한 호랑이의 얼굴은 산중호걸의 위엄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산군에 걸맞지 않은 어색한 표정과는 별개로, 근육의 굴곡을 따라 이어지는 명암이 그려내는 가죽의 두께감이라든지, 아주 가는 붓으로 수만 번 반복하여 살아 움직일 듯한 털의 섬세함이 기교적인 면에서는 으뜸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기교가 호랑이의 위엄은 살리지 못했을까.
이는 미술사학계에서도 해석이 나뉜다. 조선의 혼이라고 할 수 있는 호랑이를, 일제의 요구에 의해 그려야 했던 작가의 의도적인 저항이라는 시각에 나는 동의하는 바이다. 그림을 보다 보면 화려한 기교와 슬픈 배경의 괴리가, 겉모습은 일제에 의해 화려한 옷을 입은 듯하지만 정작 내면은 자신의 의지대로 포효하지 못하는 조선의 상황이 떠오르게끔 한다. 서슬 퍼런 일제의 요구에 응하는 대신 정작 영혼까지는 팔지 못했던 작가의 망설임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아마 내가 이 호랑이가 강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건, 작가가 느꼈을 그 복잡 미묘한 감정에 '감응'해서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완벽함에서 오는 감동이 아니라, 정교한 털가죽과 대비되는 미묘한 불협화음이라는 틈에서 온 감응을 느꼈다.
그림 속 호랑이를 보고 있자니 문득 거울을 보는 냥 내가 겹쳐 보인다. 여러 사람과 두루두루 잘 지내고 싶은 마음에 아니, 잘 지내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에 때로는 즐겁지도 않은 대화 속에서 어설프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나의 모습 말이다. 동의하지 않아도 적당히 고개를 주억거리고, 웃기지 않은 말에도 가느다란 웃음을 섞었다. 세상이 요구하는 나를 연기하기 위해 털가죽을 뒤집어썼지만, 정작 내면은 뭉툭한 이빨을 드러낸 채 어설프게 포효했다. 순간, 작가가 간파당했듯 나의 어설픔도 실은 모두에게 공개된 건 아닌지 걱정과 오싹함이 덮친다.
하지만 생의 발버둥으로 어설픈 호랑이를 그린 작가의 마음처럼, 내 어설픈 미소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내 어설픈 표정은 가짜라기보다는 진심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나의 가장 솔직한 상태다. 적어도 그 속에는 나를 지키고 싶은 인간적인 간절함과 다른 이를 배려하려는 나의 배려가 깃들어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하여 억지웃음에 경직되었던 어깨를 어루만지며, 오늘도 어설픈 포효를 이어간 나를 가만히 다독여 본다. 세상이 기대하는 위엄 있는 호랑이는 아닐지라도, 나만의 필치로 나만의 도화지를 채워나가는 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