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실수였다. 손가락을 종이에 베인 것은. 아무 이유 없이 살살 상처를 벌려 본다. 하지만 기대한 만큼 깊숙이 베여 살 사이가 벌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다. 사소해 보이는 상처에 비해 통증은 반비례했다.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그래서 읽던 책도 덮어두고 상처에 집중하고 있는 이유다. 피부는 그리 두껍지도 않으면서 인체 내부의 근육이나 장기를 보호하는 기능이 상당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은 인체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 짓는 기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처가 나서 벌어진 피부 아래 드러난 속피부는 안일까, 밖일까? 문이란 내부와 외부를 구분 짓는 가장 쉬운 기준이다. 그렇다면 문이 열린 내부는 안일까, 밖일까? 통유리 창으로 밖을 바라볼 때, 내 몸은 안에 있으나 바깥풍경을 바라보며 밖을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안에 있는 것일까, 밖에 있는 것일까? 숨이란 코와 입으로 들이 킨 공기를 폐와 기도를 거쳐 다시 코와 입으로 뱉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숨은 안에서 나온 것일까, 밖에 있는 것일까? 가끔 호흡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의식하면 오히려 숨을 쉬기 힘들 때가 있다. 안과 밖을 생각하다 보니 되려 뭐가 진짜 안인지, 밖인지 혼란이 찾아온다. 문득 면이 하나뿐이라 안팎의 구분이 사라진 뫼비우스의 띠가 떠오른다.
모자 관계는 인간이 맺는 관계 중 가장 먼저 시작되면서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안과 밖’의 경계가 가장 역동적으로 변하는 관계가 아닐까. 자식이란 세상에서 유일하게 타인의 장기를 어미인 내 몸 안에 품어 열 달 동안 한 몸이었지만, 출생과 함께 물리적인 탯줄이 끊어짐과 동시에 나와 육체적으로 분리된 존재다. 그렇게 자식은 나와 타인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가 아플 땐 내가 아픈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아이의 성취가 곧 나의 성취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와 너’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이 일체감은 사랑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로를 구속하는 굴레가 되기도 한다. 진작 나의 간섭이 성가셔지기 시작하는 아이를 보며 아이에 대한 나의 관심이 과연 진정으로 사랑인지, 구속인지 혼돈이 온다. 사랑이라면 서로에게 충만감을 주어야 할 터인데 한쪽이 부담스러워하거나 성가시게 느낀다면 그것은 나와 너의 관계가 아닌, 나만의 관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요새 문득 사소한 일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수시로 하는 아이의 버릇을 지적한 적이 있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이거 부탁해서 미안한데, 방해해서 미안한데… 미안한 일에 미안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뭐가 그렇게 미안한 일이 많은 걸까. 일단 미안하다로 말을 시작하는 아이의 모습이 어미 마음에 박혔다. 그래서 상대방이 배려해 준 일에 대해 민폐를 끼쳐 미안한 마음 전에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마음을 먼저 담는 게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나는 부모로서 자식에게 바른 방향을 제시해 준 듯 해 내 대답에 스스로 꽤 만족했고, 아이도 나름 납득한 듯 보였다. 그리고 다음 날, 닫히려던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준 이웃에게 거듭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는 나를 보며 일순 머리가 하얘졌다. 돌연 모든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는 십여 년 간 나의 이런 말버릇과 습관을 먹고 자란 것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아이를 통해 내가 이런 버릇을 가진 것을 발견했다. 과연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 할 만하다. 엄마의 입에서 밖으로 나온 말 한마디는 아이의 내면에 깃들고, 아이가 돌발적으로 저지른 행동에서 엄마는 잊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인지, 누가 누구를 돌보는 것인지 참으로 경계가 모호한 관계다.
엄마라는 존재는 아이에게 가장 안락한 내부였다가, 어느덧 아이가 딛고 서야 할 세상이라는 외부가 된다. 나 역시 부모님 그늘 아래 있을 때에는 밖에서 지친 고단한 몸을 이끌고 들어와 ‘내 있을 곳은 여기뿐, 내 집뿐이리…’ 노래를 불렀지만, 그 집은 어느새 외부가 되어 얼른 ‘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모자 관계는 숙명적으로,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완벽한 분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 아닌가 싶다. 품 안의 자식일 때는 아이의 모든 세계가 엄마라는 내 울타리 ‘안’에 머물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점차 자기만의 ‘밖’을 구축한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가 안전하게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존재이자, 동시에 아이가 밖에서 지칠 때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안이 되어주어야 할 것이다.
응당 그것이 부모의 역할이자 소임이라는 것을 알건만 ‘혼자 할 수 있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게, 엄마랑 나는 다르잖아’라는 말을 들으면 밀려드는 서운함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서운함과 대견함 사이의 모호한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아직 초등학생인데라는 마음과 벌써 고학년인데라는 생각 사이에서 초보 엄마는 아직도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안과 밖의 경계를 어디쯤에 두어야 할지, 아이의 독립심과 엄마의 보살핌 사이에서 적절한 거리를 고민하고 있는 지금의 고충을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었던 친정 엄마에게 하소연할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