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테스크 예찬

비너스에서 못난이 인형까지

by 구기자

어릴 적, 나는 언니로부터 물려받은 바비 인형이 있었다. 언니가 그랬고, 내가 그랬고, 나의 친구들도 그랬듯이 세상 여자아이들은 누구나 바비처럼 되길 꿈꿨다. 길고 늘씬한 팔다리, 잘록한 허리, 투명한 피부에 풍성한 머리칼. 하지만 현실의 강력한 유전자는 평균보다 ‘아주 약간’ 작은 키와 통통한 하체, 거기에 짧은 팔다리를 내게 물려주면서 일찌감치 바비 인형이 되고 싶다는 꿈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바비는 인형의 집 안 핑크빛 조개 소파 —우리 집 소파는 평범한 검은색 가죽 소파였다 — 만큼이나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세계, 그 자체였다. 어쨌든 바비가 내게 영향을 미친 것이 있다면, 내가 그다지 예쁘진 않다는 걸 일찍 깨닫게 해 줘서 내 장래 희망 리스트에 선생님이나 경찰관은 있었어도 미스코리아나 연예인은 없었다는 것, 그 정도겠다.

그런데 요 몇 년 낌새가 요상하다. 예쁘고 반짝거리는 것들이 점령하던 시대는 어디 가고, 하나둘씩 아이들에게 못생기고 하찮은 것들이 달리더니 이젠 어른들 가방도 심상치 않다. 며칠 전, 아이가 내게 키링을 쑥 내밀더니 “진짜 귀엽지? 히히.”하는 것이다. 그것은… 몇 달 정도는 양치를 안 한 것 같은 누렇고 치열이 엉망인 인형이었다. 이게 요새 유행이란다. 기가 차서 한참을 바라보니, 이건 또 뭐야. 이빨 요정같이 생겨서는 눈도 제대로 못 떠서 몰골이 처참한데, 이 못생긴 게 또 은근히 눈이 가고 정이 간다. 잘 생긴데 이유는 없어도, 못 생긴 데에는 서사가 있을 것이라는 궁금증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아니면 저 못난이를 누가 아껴주나 하는 평강공주 증후군에라도 걸린 것인지. 어느 날부터인가 그것은 내 가방에 걸리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가방보다 어떤 키링이 달려있는지에 눈길부터 가는데, 못생기면 못생길수록 점수가 후하게 매겨진다. 특히나 눈에 띄게 못생긴 아이를 발견하면 어김없이 그쪽 주인도 나를 아니, 내 키링을 보고 있다. 그럼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생각한다. ‘내게 더 못 생겼어… 좋아, 승!’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고대에서부터 이어진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인간 군상은 변하지 않았다는데, 5천 년의 인류 역사를 가볍게 뒤집는 이 유행은 어쩌다 시작되었을까. 인간의 미의 기준이 이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었나. 비너스, 그리고 바비까지 이어진 것의 결과가 이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인형이었다는 건가.

인류 역사는 인간에게 늘 아름답기를 강요했다. 미술사적으로도 르네상스의 화풍은 오래도록 화가들에게 이상적이면서도 완벽한 아름다움만을 허락했다. 하지만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현실의 찌푸려진 표정에서 느껴지는 진실이었다. 삶은 완벽하지도, 고귀한 아름다움만 가득하지도 않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기계와 기술이 가져다주는 완벽함에서 오는 피곤함과 불안은 역설적으로 비현실적일 정도의 왜곡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요새 누구나의 가방에 달려있는 못생긴 키링을 볼 때면 유독 심각해지는 이유다.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는 지금 SNS와 미디어의 영향으로 완벽에 가까운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강요받는다. 이러한 피로감 속에서 못생긴 인형은 위로와 더불어 일종의 해방감을 선사한다. 그러니까 못 생기면 못 생길수록 더욱 위안이 된다는 건데, 도대체 얼마나 피로감을 느끼면 여기까지 와버렸다는 것인가!

우리 모두는 한때, 그리스의 조각상처럼 완벽해지길 원했다. 하지만 결국 완벽을 추구하던 결과는 우리가 조각상은 아니라는 단순한 진실일 것이다. 가장 완벽한 비율로 만들어진 바비가 아닌, 어딘가 삐딱하고 억울하게 생기기까지 한 못생긴 키링이 인기를 끄는 이 아이러니가 바로 우리 시대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완벽한 미소는 지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빛나기를 포기하지 않는 미소를 마음껏 예찬하려 한다.

자세히 보아도 못생겼다. ...너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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