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국인에게 밥만큼 큰 의미를 가진 것이 과연 있을까.
“밥은 먹고 가야지~”라고 염려로 시작하는 관심부터, “밥도 안 먹이고 일을 시켰단 말이야?”라는 말이 나오면 그 사람은 세상 불한당이 되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방금까지 배부르게 삼겹살을 구워 먹고도 ‘이제 밥 시킬까?라는 말이 안 나오면 내가 '밥맛' 없게 굴었나?라는 의문이 들며, 심지어 ‘그저 숟가락을 얹었을 뿐입니다’라고 겸손을 표한다. 오죽하면 이런 노래도 있다. "밥밥띠라라~따라라띠리라라~"
한국인에게 밥이란 아이덴티티, 그 자체다.
미국에서는 점심 도시락을 보통 갈색 종이봉투에 담아 오던 관습에서 유래한 ‘브라운 백 미팅’이 있다. 외부로 나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회의실에서 도시락 또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진행하는 회의를 뜻한다. 하지만 점심시간마저 반납하고 업무를 계속하라니, 너무한 거 아닌가. 한국인인 내게 있어 식사시간이란, 단순히 배를 채우는 물리적인 행동을 넘어 사회적 결속과 감정의 교류가 일어나는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의미가 담긴 시간이다. 그런데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어 먹으며 10분 안에 당장의 배고픔을 해소하고 업무를 한다는 것은 현대인의 효율적인 삶이라기보다는, 무엇을 위해 일을 하나 하는 서글픈 주객전도의 현장인 것이다.
얼마 전, 친구가 젊은 MZ 세대와 함께 일하면서 오는 세대차이ㅡ 당연히 나와 친구는 올드 세대다 ㅡ에 대해 호소했다. 직급이 있다 보니 점심시간에 팀원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돈독한 업무 환경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업무 중 하나인데, 요새 젊은이들은 다이어트를 이유로 같이 밥 먹을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시작된 불만은 알알이 감자 엮어내듯 업무 태도에 대한 지적으로 이어졌는데, 아무래도 그녀는 내 친구에게 단단히 밉보인 모양이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친구의 불만이 그녀와 식구食口가 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녀의 업무 태도 불량에서 온 것인지 어느새 헷갈리기 시작했다.
같이 식사하시죠.
얼마 전, 취미로 하는 영어연설클럽의 다른 지역 모임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전날 시댁에 아이를 맡기고, 새벽부터 준비해서 올라가 연설까지 한바탕 치르고 나니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또 '밥'이다. 멀리서 온 손님에게 '밥'이라도 대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긴장해서 아침도 제대로 못 드셨을 텐데, 그냥 보낼 수가 있어야죠." 그 한마디가 나를 순간 고개 숙이게 만들었다. 밥 한 끼 먹는 게 뭐 대수라고, 내가 얼마나 유별나서 그리 툴툴댔단 말인가.
아작!!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테이블 너머로 상대방을 면면히 관찰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식당에서 숟가락을 부딪혀가며 이것 드셔보세요, 저것도 드셔보세요라고 권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분명히 종이 한 장 차이는 아닐 것이다. 종종 식사 시간을 브레인스토밍의 현장이라 한다. 밥을 먹기 위해 입을 열다 보면, 어느새 입을 열고 의견을 내뱉게 되는 게 아닐까. 입을 열어야 뭐라도 나오는 법이다. 식탁 위에서 펼쳐지는 이 '작은 운동'이 나를 건강하게, 또 움직이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 의자를 꺼내 식탁 앞에 앉는다. 그리고 그전에 가끔은 일부러라도 함께 식사를 할 이를 찾을 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