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보면 보이는 산하-강화 2
6월 초의 날씨는 덥지 않고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강화 북단의 연미정에서 강화읍까지의 길은 얕은 구릉지대와 숲길이다. 가끔 마을을 지나지만 잠깐이다. 구릉지대의 숲은 마을과 마을을 가르고 있으며 그래도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능선까지 개발의 손길이 미치고 있는 곳이 가끔 나타나곤 한다. 숲을 걷다 보니 자기 땅을 다른 땅과 구분하기 위해서 탱자나무 담이 길게 쳐놓은 곳도 있다. 갑곶돈대에서 보았던 그 탱자나무의 자손들이 퍼져 있는 듯하다. 강화 외곽 도로인 강화-인화 도로 밑을 지나니 강화 북문이 지척이다. 대산리에서 북문까지의 숲길에는 산딸기가 지천이다. 산딸기가 아직 완전히 익지 않았지만 몇 개를 따먹으니 달콤하고 시큼한 맛이 일품이다. 길가의 산에는 약을 치지 않았을 것이니 마음 놓고 따먹을 수 있다. 지나는 사람들이 산딸기에 거의 손을 대지 않은 것이 이채롭다. 강화읍에서 차 한잔을 하기 위해서 들린 카페 주인 말이 강화에는 산딸기가 많다고 한다. 강화 북산의 북쪽 사면이 위치한 오읍 약수에서 북문까지는 나무가 우거져 운치 있는 길이다.
마침내 강화 북문에 도착했다. 원래 강화 나들길 1코스는 오읍 약수에서 북장대로 가야 하지만, 그 길은 몇 년 전에 가본 적이 있어 곧바로 북문으로 직행했다. 강화 산성과 4개의 문은 본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도 있지만 강화 북문은 복원한 것이다. 한 사학자의 얘기로 북문의 복원이 너무 빨리 졸속으로 이루어져 앞뒤가 바뀌어 복원되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고쳐졌는지 모르겠다. 북문에서 성곽길을 따라 걷지 않고 바로 강화읍으로 내려왔다. 북문에서 성곽길을 따라 은수물-강화향교를 가는 길도 몇 해전에 걸어 보았다. 북문은 여러 번 와봤지만, 천천히 걸으면서 주변을 보니 풍경이 새롭다. 북문에서 고려궁지 가는 길에서 고려궁지 바로 전에 우람한 은행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는 데 그때 나이가 688년이란다. 지금은 700살이 넘은 은행나무다. 우리 나이가 덧없게 느껴진다. 강화에는 큰 나무들이 많다. 300살~400살 나무는 흔하고 이렇게 나이가 많은 나무들이 많다. 그중에서 은행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가 오래 산다. 700살 먹은 은행나무는 짙푸른 은행잎을 무수히 달고 있다. 나이는 700살이지만 여전히 청춘이다. 우리 사회가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100살까지 사는 사람들이 많은 데 은행나무처럼 나이를 먹더라도 건강하게 사는 것이 관건이 시대가 되었다.
고려궁지에 도착했다. 강화에 여러 번 왔지만 어쩐 일인지 고려궁지는 세심히 보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고려궁지를 샅샅이 둘러보았다. 고려궁지는 1232년 몽골 침략으로 고려가 강화로 천도하면서 만들어진 작은 궁궐이다. 당시의 건물은 소실되고 후대의 건물이 몇 채 남아있다. 강화유수부 이방청은 후대 건물로 보존 상태가 좋다. 강화동종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동종이다. 고려궁지는 높은 지대에 만들어져 있어 강화읍 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림 1] 강화 북문 가는 길에서 만난 700살 먹은 보호수 은행나무. 700살 먹은 나무가 청춘이다. 인간의 삶이 덧없게 느껴진다.
고려궁지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은 아마 외규장각일 것이다. 외규장각에는 왕실 서적이 많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외규장각 의궤를 포함한 일부 서적을 약탈해 갔고, 나머지는 불 질러서 소실되었다. 19세기 말에 힘없었던 조선의 상황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다행히 외규장각 고문서는 프랑스로부터 반환을 받았다. 정조가 화성으로 행차하는 의궤 그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림 2] 강화 고려 궁지에서 만난 이색적인 나무. 안개 나무(스모그 트리)가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이 나무가 왜 고려궁지에 있는지 의아하다.
고려궁지에 이채로운 나무 하나가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지나는 사람들이 나무 이름을 몰라서 궁금해한다. 한 남자가 다음꽃 검색으로 이 나무를 자귀라고 한다. 나무 이름을 알고 있던 아내는 자귀가 아니라 스모그 트리라고 알려준다. 내 아내는 나보다 나무 이름을 더 많이 알고 있다. 아마 집에서 화초를 키우면서 관심을 가지다 보니 그런가 보다.
고려궁지 바로 밑에는 강화성당과 진무영 순교지가 있다. 오늘은 학생들이 성당에서 어떤 행사를 준비하는지 분주하다. 갑곶돈대에서 순교지를 보았는데 이곳에 또 다른 순교지가 있다. 천주교는 크게 네 차례 박해를 받았는데,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에 많은 신자와 성직자가 순교했다고 한다. 진무영은 조선 시대에 해안을 방어하기 위한 군영을 말한다. 1866년 조선이 프랑스 성직자 9명을 처형하자 프랑스 함대는 강화도를 침입하여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병인양요로 인해 조선은 천주교를 더욱 탄압하였는데 진무영 순교지는 1886년 진무영에서 처형당한 천주교 신자를 기린 곳이고 갑곶진 순교지는 1871년에 일어난 박해의 순교지이다.
고려궁지에서 조금 내려오니 용흥궁과 성공회 강화성당은 이웃해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여러 번 방문해 보았지만, 작년에 용흥궁에 왔을 때 코로나로 폐쇄해있었다. 올해는 모두 개방되어 있어 이곳저곳을 다 둘러볼 수 있다. 용흥궁은 철종이 왕이 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원래 민가였으나 강화유수 정기세가 기와집을 지어서 용흥궁이라 하였단다. 용흥궁 바로 위 언덕 위에 성공회 강화성당이 있다. 강화는 종교의 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니산의 첨성대가 있고, 정족산성의 전등사, 석모도의 보문사는 전통 있는 불교 사찰이다. 강화도는 근대문물이 들어올 때 서양이 택한 대표적인 포교지의 한 곳이다. 강화에는 성공회 성당, 침례교회 등을 흔히 볼 수 있다. 성공회는 16세기 종교개혁 때 영국에서 성립한 교단이다. 영국은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하여 교황의 간섭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 3] 성공회 강화성당의 외양과 뒤뜰에 그려진 라비란스. 미로를 걸으면서 어떤 기원을 하는 것일까?
성공회 강화성당은 포교할 때 현지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당이다. 조선 백성과의 괴리감을 낮추기 위해서 외향을 2층의 한옥으로 지었다. 한옥의 날렵한 모습은 구원의 방주를 표방하여 배 모양이다. 성당의 내부는 전통 한옥과 서양의 바실리카 양식을 혼합해 놓았다.
[그림 4] 강화 성공회 성당의 현판, 주련, 처마 밑의 문양, 내부 전경과 십자가가 그려진 동종이 이채롭다.
성당의 현판도 불교 사찰의 모습과 비슷하게 생겼다. 천주성전이라 한자의 현판이 성당임을 알려주고 있다. 기둥에는 사찰의 주련과 비슷하게 한자로 교회의 글귀가 쓰여있다. 성당 지붕 밑의 기둥에 태극 문양과 십자가 문양이 이채롭다. 성당에는 서양종 대신에 우리나라 동종 모양의 종이 걸려 있으며 종에 십자가 문양을 새기고 있다. 당시 조선의 백성은 마치 절집에 가는 기분으로 성공회 성당에 갔을 것이다. 성당의 외양만 보고는 어떤 이질감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19세기의 외세의 극심한 침입과 궁핍한 생활에서 구원의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성당의 뒤뜰에는 외국에서나 볼 수 있는 미궁(Labyrinth, 라비린스)이 그려져 있다. 미로를 돌면서 구원을 갈구할 수 있다.
[그림 5] 강화 성공회 성당 마당에 서 있는 보리자나무. 사찰에 있어야 하는 보리자나무가 여기 서 있으니 웬일일까?
성당 입구의 앞마당 한쪽에는 커다란 보리수나무가 꽃을 피울듯하며 서 있다. 부처님이 득도했던 보리수가 성당 앞에 서 있다니 매우 이채롭다. 사실 부처님이 득도했던 인도보리수는 열대성 식물이라 우리나라에서 월동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가 식용으로 먹는 보리수와는 전혀 다른 나무이다. 이 나무는 인도보리수와 비슷한 나무인 보리자나무란다. 절집 뜰에나 있어야 할 보리자나무가 이곳에 서 있는 것이 이질적이다. 보리자나무가 강화 전등사 경내에도 있다고 하니 한번 찾아보아야겠다.
2022년 6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