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비임비의 소소한 대화
임비 와, 젠더갈등을 유발하는 이런 구닥다리 말을 어디서 꺼냈어?
곰비 ‘과부는 은이 서 말’이란 뒷말 때문에?
임비 당근이지. 아무리 속담이어도 잘못 사용하면 젠더갈등이니 뭐니 하면서 한바탕 난리날 텐데.
곰비 겁 먹기는, 쩝. 내가 이 말을 꺼낸 것은 상실을 대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야. 홀아비나 과부나 모두 배우자를 잃은 상태잖아. 배우자면 사랑이 어떤 색깔로 변화했든, 삶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란 말이지. 그런 배우자를 잃었는데 한쪽은 이가 서 말이고, 다른 한쪽은 은이 서 말이야. 왜 그럴까.
임비 이 속담이 나왔을 때는 적어도 백년 이상일 거야. 그치. 그런데 그 때 여자들은 변변한 돈벌이도 없었을텐데, 어떻게 단단하게 잘 살았을까. 이건 분명히 남성 혐오주의자가 만든 말이 아닐까?
곰비 야!!! 야,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건 아니지. 일부러 논점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거 같잖아. 또 네가 말한 그 시절이면 남자는 하늘이었을텐데. 아, 이것도 농담이라고 하자. 어쨌든 문득 이 속담이 생각난 이유는 상실 이후의 존재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었어.
은을 모은 사람은 자기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내적인 축적이나 생존력, 상실 이후의 회복력이 매우 좋았던 사람이잖아.
그런데 이가 서 말인 사람은 능동적인 회복력을 상실한 사람이고. 그 차이가 뭘까?
임비 야, 뭘 그리 깊게 생각해. 그냥 홀아비의 상심이 더 컸다고 생각해. 낭만 있잖아. 자기 자신도 돌보지 못할 만큼 깊은 슬픔에 빠진 거라니까.
곰비 낭만? 좋지. 아무리 그래도 이가 서 말은 아니지.
이가 서 말인 사람은 삶이 예측 가능한 것이라 착각했을 수 있어. 잘 살든 못 살든 평생 일정한 범위 안에서 살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한 거지.
그래서 돌발상황인 죽음, 이혼, 상실, 실패, 질병 등에 대해 감정적인 대응만 할 줄 알았던 거지.
말하자면, 실존적 삶의 태도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산 거 같아.
임비 야, 솔직히 배움의 장이란 게 학교나 사회, 혹은 가정이라고 치면, 학교에서 ‘정답 있는 문제’만 풀었고, 정답을 맞춘 정도대로 취업을 해서 사회에 나왔고, 직장에서는 또 어떻게 하면 승진을 하는지, 측정 가능한 목표만 좇고 있잖아. 그런데 실존적 삶이라니.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삶의 태도야?
곰비 맞아. 정답지를 보듯이 늘 예측 가능한 삶인 듯 살아왔지. 그래서 예정된 경로에서 벗어나는 순간 공황, 우울 등에 빠지는 거고. 원래 삶이란 게 늘 예측 불가능한 건데 말이야.
임비 삶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건 다 알아. 근데 막상 부딪치는 건 또 다르니까 좀 헤매는 것 뿐이지. 근데 실존적 삶의 태도를 배우지 못했네 어쩌네 하니까 갑자기 찌질이가 된 것 같잖아.
곰비 그랬어? 하긴 정답이 있는 문제에선 성적 우수자였으니까. 나 역시 삶에서 진짜 중요하고 소중한 것을 잘 배우고, 돌보면서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예를 들면, 나는 나를 잘 돌보며 살고 있나, 난 내면의 성장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나, 하는 것 말이야. 또 절망에 빠졌을 때의 회복력 등등.
솔직히 난 나를 오롯이 대면한 적이 있나 싶어. 심지어 어떤 때는 그저 나 혼자 있는 것 조차 이상할 때가 많아.
나 혼자 있는 것, 무의미한 것, 이런 것을 마주하는 것도 낯설어서 전전긍긍하더라고. 혼자 밥 먹는 것도 어색해서 꼭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말이야. 그런데 평생 있을 것같았던 배우자가 사라졌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해.
임비 네 말을 듣다 보니, 이가 서 말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외부적인 무언가에 엄청 기대 살고 있었던 거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쓰는 ‘혼밥 메이트’란 모순적인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혼자인 것도 못하고. 그러니 메이트라 말하고, 실질적으로 기대 산 그 외부 요소가 사라지면서 내면이 무너지고. 그래서 홀아비는 결국 독립적인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곰비 화 내지 말고, 홀아비 문제가 아니라, 상실과 혼돈 앞에 선 사람.
어디선가 읽은 내용인데, 사람이 상실을 겪으면 다섯 단계의 과정을 거친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그런데 외부적인 것, 심지어 자신이라고 착각했던, 그래서 항상 있을 것이라 착각했던 외부적인 무언가가 무너졌고, 느닷없이 닥친 상실에 수용의 단계까지 못 가고 주저앉은 거지.
가장 기본적인 자기 돌봄이 안된거야. 쩝.
임비 곰비야, 그건 그냥 외로운 사람인 거야. 갑자기 닥친 외로움에 어쩔 줄 모르고 주저앉은 사람. 그걸 자기 돌봄이 안된 인간이라고 하면 너무 찌질해 보이잖아.
곰비 너야말로 ‘멋진’, ‘찌질한’ 이란 이분법적인 잣대로 보는 건 아니고? 난 그저 상실 앞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삶과 그 무게를 실존적으로 마주하게 되었고, 끝내 제대로 보지 못하고 주저앉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잘났니, 찌질하니 이런 게 아니고. 에휴! 그게 절망이겠지. 어쩌면 죽음에 이르게 할지도 모르는.
그러니 공부 잘하고, 좋은 직장 다니는 능력만이 곧 잘 사는 능력은 아닌 거야. 소유와 성과 중심의 삶만이 좋은 게 아니란 거지. 소유와 성과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문제를 삼고 들여다 볼 줄 아는 삶이 필요한 게 아닐까. 그래야 은이 서 말인 사람처럼 상실 이후에도 자기 자신을 재조직할 힘이 있지. 외부의 충격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 사람들 말이야.
임비 아, 그런 뻔한 소리. 현실에 대입할 수 없는 그런 소리는 좀 접으면 안돼? 너는 자만감이 충만한 거지가 되면 좋겠어? 공부 잘 하고, 좋은 직장 다니기 위해 바친 시간과 열정이 얼만데 그것만이 좋은 삶이 아니라고 하면, 어쩌라는 거야. 그런 거 되게 좋은 소리 같지만 무책임하단 생각은 안해? 우린 다 그렇게 교육 받고 살았는데 어쩌라고. 좋은 거라며 추구했던 게 꽝이라고 선언하면, 다시 지도를 그리고, 또 다른 좌표를 찍고 그래야 하잖아.
자신을 재조직할 힘이 곧 은이라고? 너무 추상적인 거 아니야?
곰비 뭘 그렇게 성질을 내고 그래. 새로운 지도를 그리고 좌표를 찍어? 내가 진짜 말하고 싶은 건, 대단히 큰 무언가는 아니야. 작고 구체적인 생활의 결정체들이라고. 무조건 사회에서 요구하는 성과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 말이야.
임비 하 참. 자신의 존재를 들여다보는 거, 그게 말처럼 쉽기만 한 게 아니라니까. 당장 프로젝트 끝내야 하고, 승진에서 탈락하면 자존감 바닥에, 자존심 상처에 닥칠 일이 얼만데 나를 들여다 보냐고. 밥 먹으러 갈 시간도 쪼개는 마당에 날 들여다 본다고?
우린 출근, 퇴근, 완전지침, 잠 혹은 술 한 잔. 휴일엔 몰아서 잠. 뭐 더 필요해? 그건 어느 정도 이룰 거 이룬 사람들 이야기지.
곰비 이런, 이런. 날 들여다 보는 게 날 잡고, 시간 내서 봐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냥 매순간, 문득문득, 이게 옳은 방향인가 한 번쯤 되돌아 보고, 내가 원하는 진짜를 한 번쯤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묻는 게 아닐까. 그리고 죽음이나 상실, 실패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보는 것. 그게 존재에 대한 자각일테고.
임비 말하자면,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을 어렸을 적 돼지 저금통에 동전 넣듯이 해보란 거야? 그럼 언젠가 은이 서 말이 된다, 이거네.
아, 난 어렸을 적 돼지 저금통에 동전 모으기도 안했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