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 12장 ― 형태론 中 굴절
서다 + -어 + 있거라
서 있거라
-> 섰거라
(게 섰거라의 섰거라)
우리는 흔히 "죽었다"나 "살았다"의 "-었/았-"을 과거를 나타내는 접사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러나 한국어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근대 한국어 이전까지 "-었/았-"은 과거를 나타내지도, 아예 쓰이지도 않았답니다.
대신, 지금은 조금 예스러운 표현이 된 "하더라"의 "-더-"가 과거를 나타냈었죠. 물론 여전히 "하더라도"의 꼴로는 자주 쓰이지만, 현대 한국어에서는 "-더-"가 일반적으로는 쓰이지 않는답니다. 대신, 위에서 봤던 것처럼 "-어/아 있-"에서 유래한 "-었/았-"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을 볼 수 있죠.
왜 갑자기 한국어의 과거형 접사 얘기를 꺼냈냐고요? 바로 굴절의 유형을 나누기 위해서죠!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탈색"과 "문법화" 얘기를 했었죠? 당장 위의 예시도 문법화의 예시고요. 그런데, 저번 장에서 다룬 고립어/교착어/굴절어를 다룰 땐 문법화를 빼놓을 수가 없답니다! 바로 이 셋 사이의 관계 때문이죠.
당장 위에서 보듯, 한국어에서는 본래 "-더-"가 과거를 나타내는 접사로써 "-더니", "-더라", "-던" 등에서 널리 쓰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었/았-"이 "-더-"의 자리를 밀어내며 "-더-"는 "-ㄴ"과 합쳐진 "-던"으로밖에 쓰이지 않게 되었죠.
굴절어의 특징인, 접사가 여러 뜻을 가진 하나의 큰 접사로 합쳐지는 과정입니다. 8장에서 다뤘던 것처럼, "-습니다"의 기원 또한 "-사ᆞ갑-" + "-나ᆞ-" + "-ᅌ기-" + "-다"로, 결국 이 모든 접사가 하나로 합쳐지며 하나의 접사가 된 것이죠.
또, "나 -> 내가"와 "너 -> 네가" 또한 굴절의 예시죠. 원래 "-이/가" 중 "-이"가 붙어 "내", "네"였으나 더 이상 이 형태를 "-이"가 붙은 형태로 여기지 않게 되면서 "-가"가 추가로 붙어 "내가", "네가"가 된 것이랍니다.
물론, 굴절어의 대명사인 라틴어를 보면 이 정도의 굴절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죠. 하지만 이런 라틴어도 동사의 굴절형태표를 보다 보면 교착어의 모습이 조금씩 보인답니다. 굴절어에서는 각 굴절 형태가 독립적이어야 하나, 몇몇 굴절 형태는 서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그런 한편, 불행인지 다행인지 라틴어의 후예인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루마니아어는 굴절어의 특성을 많이 잃어버렸답니다. 명사는 거의 굴절하지 않고, 동사의 굴절 형태도 라틴어에 비하면 훨씬 덜 굴절하죠.
그런 만큼 어순과 부사에 많은 것을 의존하게 되었답니다. 라틴어의 어순은 한국어보다도 자유로웠지만, 이들 언어에서는 그런 자유도가 많이 사라졌죠.
하지만 동사의 복잡성과 어순의 자유도가 함께 사라진 것으로 가장 유명한 언어는 누가 뭐래도 영어일 겁니다. 영어의 동사는 4가지(규칙 동사는 3가지)로만 굴절하며, 명사의 굴절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죠. 그런 만큼 문법의 대부분을 어순과 부사에 의지하고 있답니다. 고대 영어 때에는 굴절어였지만, 지금은 굴절어가 아닌 고립어가 되어버렸죠.
그런데 지구 반대편 중국에서는 반대로 몇천 년간 굴절어의 대명사이던 중국어가 서서히 교착어가 되어가고 있답니다. "-들"인 們, "-었/았-"인 了, "-고 있-"인 著, "-ㄴ"인 的, "-하다"인 化 같은 접사가 하나씩 생겨나고 있죠.
한국어의 접사들이 하나씩 합쳐져 어근과 구분하지 못할 정도가 된다면... 한국어는 굴절어가 되겠죠? 영어는 이미 굴절어보다 고립어의 특징을 더 가지고 있으니, 몇 가지 동사/명사 굴절만 사라진다면 순수한 고립어가 되겠네요. 중국어에서 접사의 수가 많아지고 점차 모든 어근 뒤에서 쓰이기 시작한다면 훌륭한 교착어가 될 것이고요.
이건 다 결국 단어의 문법적 요소와 의미적 요소가 얼마나 얽혀있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랍니다.
문법 기능과 의미 기능이 완전히 떨어져 있으면, 그래서 아예 다른 단어라면 고립어죠. 영어, 한국어, 라틴어를 서로 비교해 볼까요?
it would have drunk water
그게 물을 마셨겠지
aquam bibisset
비교
영어:
it | 그것
water | 물
would | -겠-
have | -었-
drunk | 마시다
동사 전에 등장 | -이/가
동사 뒤에 등장 | -을/를
라틴어:
aquam | 물을
bibisset | (그가) 마셨겠지
그것이 물을 마시었겠지
-> 그게 물을 마셨겠지
보시다시피, 교착어인 한국어에서는 접사로 나타내는 문법적 기능을, 고립어인 영어에서는 부사로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굴절어인 라틴어에서는 문법적 기능을 죄다 단어 안에 때려 박은 것을 볼 수 있고요.
문법적 기능이 부사로 나타나, 어근과 완전히 다른 단어로 등장한다면 고립어입니다. 문법적 기능이 접사로 나타나, 어근에 달라붙는 형태로 등장한다면 교착어입니다. 문법적 기능이 어근에 완전히 포함되어, 어근의 일부가 되고 어근의 형태를 '꺾어 버리는' 성질을 가지면 굴절어입니다.
부사는 쓰이다 보면 소리와 의미가 탈색이 되고 서서히 문법 요소가 되어 접사가 되어버린답니다. 한국어의 "터"가 좋은 예시죠. {건물을 위한 자리}라는 본래의 뜻을 서서히 잃어 처지나 형편을 나타내는 말로, 더 나아가 예정이나 의지를 나타내는 뜻이 되었답니다. 그래서 "할 터인데"가 "할 텐데"가 되었죠. 마치 "죽어 있다"가 "죽었다"가 된 것처럼요.
그래서 부사는 자연스럽게 탈색과 문법화를 거치며 접사가 됩니다. 그리고 고립어는 서서히 교착어가 되어가죠.
접사는 쓰이다 보면 하나로 합쳐지고, 안 쓰이는 접사는 다른 접사에 빌붙어 살아남으며, 접사는 하나하나가 정밀한 의미만을 가진 채 서로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띠게 되고, 마침내 어근과 쉽사리 분리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접사는 굴절 형태가 된답니다.
한국어의 대명사 "나"가 "내가", "날", "난", "내", "내게", "나로"로 굴절하는 것이 좋은 예시겠네요. 대명사는 다른 단어들에 비해 훨씬 많이 쓰이다 보니, 다른 단어와는 다른 형태를 가진 경우가 많답니다. 이 경우에는 한국어의 미래를 넌지시 알려주는 걸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굴절 형태는 결국 어근 밖의 굴절하는 부분들이 서서히 떨어져 나가는 결과로 이어진답니다. 사람은 말할 때마다 말의 일부를 조금씩 빼먹고, 그래서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닳다 보면 가장자리에 놓인 접사는 서서히 탈색되고 풍화되어 사라져 가죠.
마치 라틴어의 다양한 후예 언어와 영어처럼요! 그리고 굴절어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이들 언어는 사라져가는 문법 기능을 다양한 부사들과 다양한 어순을 활용해 보완한답니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 서술어와 주어의 위치를 바꾸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지만, 영어에서는 문장을 의문형으로 만드는 문법적 기능을 가지죠.
I am happy
{나는 행복하다}
am I happy
{나는 행복한가}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모든 굴절은 사라지고, 오직 부사와 고정된 어순들만이 남아 모든 문법적 기능을 책임지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 번 부사는 탈색을 겪으며 어근과 서서히 가까워지고... 이렇게 언어의 형태는 돌고 돌게 되죠.
물론, 이 모든 유형을 다 겪는 언어는 없습니다. 당장 중국어만 해도 몇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굴절어의 성질을 띤 고립어에서 교착어의 성질을 띤 고립어로 변했을 뿐이죠.
반대로, 고작 천 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완전한 굴절어에서 거의 완벽한 고립어로 변화한 영어 같은 사례도 있으니, 언어의 유형이 변하는 속도는 언어마다 다르죠.
이러한 언어의 순환 진화는 아직은 가설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지만, 문법적 기능과 실질적 의미 사이 관계가 어떤 식으로 변화하는지 쉽게 알려주기 때문에 문법화의 예시로 사용하기에 참 좋답니다!
한동안 문법으로 힘들었으니, 이번 장은 짧게 마치는 것으로 잠시 쉬었다가, 다음 장부터 본격적인 문법 개념들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