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단어에 역할을 부여해 봅시다!

2막 20장 ― 통사론 中 격

by CCCV 츠스쿠

수희야, 영희와 철희가 작년에 민희에게 보답으로써 동희의 목을 우체국에서 집으로 보냈어


이 길고 긴 한 문장을 뼈대만 남기면 아래와 같습니다.


철희가 민희에게 목을 보냈어


"철희"는 주어, "민희"와 "목"은 목적어, "보냈어"는 서술어죠. 문장에서 각 단어가 하는 역할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보냈어"는 행동, "철희"는 행동을 하는 동작주, "목"은 행동을 당하는 피동주, "민희"는 행동의 결과를 받는 수혜주이죠.


이제는 다들 아시겠지만, 문장이 연극이라면 각 단어는 배우고, 각 단어가 맡는 의미는 배역이죠? "철희"라는 명사가 주어라는 배역을, "보냈다"라는 동사가 서술어라는 배역을 맡는 것이죠.


이런 배역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문법적 격case입니다. case라고 하니 {경우}를 의미하는 case를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사실 고대 그리스어 πτῶσις {떨어짐}을 번역한 라틴어 casus {떨어짐}에서 유래한 거랍니다. 왜 {떨어짐}인지는 아래에서 얘기하죠.


어쨌든, 한국어에는 행동주임을 나타내는 "-가", 피동주임을 나타내는 "-을/를", 수혜주임을 나타내는 "-에게"라는 접사가 있어 각각 행동격, 피동격, 수혜격을 나타냅니다.


물론, 실제로 행동격, 피동격, 수혜격이라는 용어를 쓰지는 않죠. 대신, 조금 더 익숙하실 주격, 대격, 여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답니다. 다시금 명심해야 할 것은 "격은 명사의 의미를 나타내는 문법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네, 동사의 시제/상/서법/태와 동일하죠.


그러면 예문에 등장하는 모든 격을 해체해 볼까요?


철희가: 행동주 -> 주격主格nominative case
(주어, 주인 주主)

영희와: 동반 -> 공동격共同格comitative case
(부사어, 같은 자격으로 관계를 가질 공동共同)

수희야: 호명 -> 호격呼格vocative case
(독립어, 부를 호呼)

작년에: 상황 -> 처격處格locative case
(부사어, 곳 처處)

민희에게: 수혜주 -> 여격與格dative case
(목적어, 줄 여與)

보답으로써: 도구 -> 조격造格instrumental case
(부사어, 지을 조造)

동희의: 수식 -> 속격屬格genitive case
(관형어, 이을 속屬)

목을: 피동주 -> 대격對格accusative case
(목적어, 대답할 대對)

우체국에서: 원천 -> 탈격奪格ablative case
(부사어, 빼앗을 탈奪)

집으로: 방향 -> 향격向格allative case
(부사어, 향할 향向)


우와, 엄청 많죠? 하나씩 정리해볼까요?


먼저 주격입니다. 주격은 주어를 나타내죠. 주어는 서술어 다음으로 문장에서 중요한 성분이니, 당연히 특별 취급을 받습니다. 주어진 명사를 주어로 만들어 버리죠.


호격은 독립어를 나타내는 격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어진 명사를 독립어로 만들어 버립니다. 주격과 호격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격을 사격斜格oblique case라고 부릅니다. 비껴斜 나간 격이라는 뜻이죠. 문장의 핵심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제가 주어가 아닌, 서술어가 필요로 하는 문장 성분들을 죄다 목적어라고 퉁친 것도 같은 이유에서죠.


속격은 명사를 관형어로 만들어주는 격입니다. 두 명사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격이니 아주 흔하게 쓰이고, "달릴 때가 좋았는데"처럼 때에 따라 필수적인 성분이 되기도 하죠.


대격은 가장 기본적인 격 중 하나로, 보통 목적어는 대격입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목적어로 대격이 아니라 다른 격으로 필요로 할 때("개가 집으로 갔다" 등)가 있긴 하지만요, 보통은 행동에 행동을 당하는 피동주가 존재하기 마련이니 대격이 목적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당연한 거죠.


여격도 기본적인 격입니다. 보통 목적어가 둘 이상 존재할 때 하나는 피동주, 다른 하나는 수혜주인 경우가 많거든요. 영어를 배울 때 간접 목적어 배우셨죠? 바로 여격이랍니다.


조격은 여격과 비슷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격입니다. 목적어가 둘 이상 존재할 때, 피동주가 아닌 배역이 꼭 수혜주일 필요는 없거든요. 행동을 하기 위한 도구나 재료도 목적어로 쓰일 수 있죠. 여기서는 일부러 구분을 위해 "-로써"를 사용했지만, 실제로는 "-로"의 범위가 워낙 광범위해 "-로서"와 "-로써"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죠.


공동격은 동반격으로도 불리는데, 예문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와 내가 왔다", "네가 나랑 결혼했다" 같은 것이죠. 전자처럼 부사어도 되고, 후자처럼 목적어도 된답니다. 사실, 많은 사격이 둘 다 되죠. 문장 성분이 정해진 속격과 대격이 특이한 경우랍니다.


처격, 향격, 탈격은 연극에 비유하자면 무대의 배경과도 같은 격들이랍니다. 처격은 배경이 일어난 상황(시간, 장소, 이유 등), 향격은 그 배경을 향한 움직임을, 탈격은 그 배경에서 나오는 방향의 움직임을 의미하죠.


예문을 통해 익혀 볼까요? "내가 아침에 집에서 학교로 갔다" 현재 무대의 배경은 아침 등굣길입니다. 아침이라는 배경은 처격을 통해, 등굣길이라는 배경은 탈격인 "집에서"와 향격인 "학교로"로 있죠.


물론, 한국어에 빠삭하신 여러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격이 꼭 정확히 그 의미로만 쓰이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 향격 조사인 "-로"도 열 가지가 넘는 의미를 가지고 있죠. 방향을 넘어 목표 지점을 나타내기도 하고, 움직임의 경로, 변화의 결과, 방법/방식, 원인/이유, "-로서"의 지위/자격, "-로써"의 도구/재료의 의미를 모두 향격인 "-로"가 나타낸답니다.


물론, 각각의 의미를 모두 별개의 격으로 나눌 수 있겠지만, 한국어는 이 모든 역할을 향격이 맡는 것이죠. 슬슬 지겨우시겠지만 다시 한번 복습하면, 의미는 셀 수 없이 세세하게 나눌 수 있지만, 문법은 여러 의미를 담는 각 꼴을 찾는 거라고요.


당장 탈격이 주격을 의미하는 경우가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쓰인답니다. "학교에서 가정통지서를 나눠줬다"나 "나라에서 보조금을 지급했다" 같은 말을 보면, 한국어에서는 집단을 의미하는 명사가 주어로 왔을 때 탈격이 주어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답니다.


또, "얼음이 물이 되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처럼 주격을 나타내는 접사가 목적어, 이 경우 대격을 나타내기도 한답니다. "사장에게서 뒷돈을 받았다"와 "사장에게 뒷돈을 받았다"처럼, 완전히 방향이 반대인데도 둘이 똑같은 의미를 가지기도 하죠.


한편, 스페인어 같은 언어에서는 의미상 탈격과 속격의 차이를 두지 않는답니다. 둘 다 부사 de로 표현하거든요.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무로부터 온"과 "나무의"이 비슷한 의미인 것을 생각해 보면 escritorio de madera {책상} {로부터} {나무}, {나무 책상}이라는 구조도 이해가 가죠.


언어마다 격의 개수는 제각기 다르답니다. 당장 한국어의 격의 개수도 6~10까지 정론이 없으니까요. 가장 격의 개수가 적은 언어는 격이 없는 유럽권의 영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동아시아의 중국어, 마인어, 베트남어, 태국어 등이 있습니다. 모두 과거의 복잡한 격 변화를 잃고 현대의 부사 체계가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죠. 즉, 굴절어에서 고립어가 되거나, 이미 됐다는 거랍니다.


아예 격이 없어서 어순과 부사로만 나타내면 몰라도, 격이 두세 개인 언어는 어떻게 하는 거죠? 간단하답니다. 명사를 바꾸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격을 나타내는 것이죠. 물론, 어순이나 부사로 격을 나타내도 격이라고 부를 수 있긴 하지만, 창언창안에서는 그렇게 분류하지 않으니까요. 시제/상/태/서법처럼요.


반대로, 격이 사라지더라도 한 격이 다른 격들의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한국어의 예시를 보면 향격 "-로"가 조격 "-로써"가 대신하는 경우가 있죠? 혹시 "-로써"가 사라져 "-로"만 쓰인다면 한 격이 다른 격의 역할까지 맡게 되는 것이죠.


간혹 대격, 속격과 같은 중요한 격까지 하나의 격이 모두 맡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런 격에 사격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답니다. 주격과 대비해서 쓰는 것이죠.


이렇게 격이 사라지는 경우를 볼 때 중요한 개념이 격 위계case hierarchy랍니다. 바로 만나볼까요?

주격 - 대격 - 속격 - 여격 - 처격 - 탈격/조격 - 다른 격

대부분의 언어에서, 격이 줄어든다면 왼쪽의 격이 살아남고 오른쪽의 격이 사라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즉, 2격 언어라면 주격과 대격만이, 5격 언어라면 주격, 대격, 속격, 여격, 처격만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물론, 경향은 경향일 뿐이고, 예외는 많답니다.


반대로 격이 많아지면 어디까지 많아질 수 있을까요? 수없이 많아질 수 있죠. 처격, 향격, 탈격이 배경과 그 움직임을 의미하던 걸 기억하시나요? 그 움직임을 세세히 나눠서 표현하자면 끝이 없겠죠? 그래서 실제로 15격의 핀란드어, 18격의 헝가리어, 아무도 정확한 숫자에 합의할 수는 없지만 일단 크게 잡으면 128가지 격을 가진 체즈어가 있답니다.


이런 언어에서는 주된 상황, 부가적 상황, "아래에 있다", "위에 있다", "안에 있다", "밖에 있다", "안으로 간다", "밖으로 간다", "안에서 나온다", "밖에서 나온다", 등등을 모두 격으로 나타낸답니다.


어딘가 친숙하지 않나요? 네, 태나 서법, 성과 마찬가지로, 작정하고 나누고자 하면 셀 수 없이 나눌 수 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을 문법이 아닌 부사어로 나타내고, 정말 필수적인 몇 가지만 문법화해 나타낸다는 것이죠. 제가 추천하는 것은 0~5격입니다. 너무 많아도 힘드니까요.


자, 그럼 격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봐야겠죠? 하지만 이것 역시 안타깝게도 많은 증거가 있진 않답니다. 그러나 몇 가지 힌트는 있죠. 먼저, 격끼리의 자리바꿈입니다. 시제/상/태/서법처럼, 격끼리도 서로의 의미를 뺏는 일이 많죠.


예를 들어, 조격과 공동격은 같은 격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고, 탈격과 조격은 둘이 같이 있다가도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먹는 경우가 많답니다. 또, 흔히 주격이 단어의 기본 형태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격이 사라질 때 꼭 주격의 형태로 남는 것은 아니랍니다. 라틴어의 후예 언어들은 대격을 기본형으로 삼아 대격의 꼴에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죠.


물론 격의 탄생을 대략적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습니다. 고립어 -> 교착어 -> 굴절어 -> 고립어로 가는 전체적인 순환은 아시죠? 고립어에서는 격이 없고 어순을 통해 주격/대격/속격/여격 등의 대체적인 격과 부사어를 통해 세부적인 의미를 전한다는 것도 아시겠죠.


그러면 이런 부사어들이 점차 탈색당해 의미를 잃고 문법화가 되어 명사에 달라붙게 된다면 교착어가 되겠죠? 당장 한국어의 접사들도 동사와 부사에서 유래한 것이 눈에 보이니까요. "보다", "부터", "조차" 같이 지금까지 창언창안에 나온 예시들 외에도 "-서" 계열의 접사들이 "있어"와 같은 유래를 가졌다는 예시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접사들이 시간이 더 지나며 명사의 일부분이 된다면 굴절어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굴절어의 복잡한 굴절 체계가 단순화되고, 점차 굴절이 마모되어 사라지며 한 가지 형태만 남아 다시금 고립어가 되는 것이고요.


자, 마지막으로 격의 쓰임입니다. 격은 명사의 형태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지만, 격에 따라 주위 단어의 모습이 달라지기도 한답니다. 명사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뭐죠? 바로 명사를 수식하는 관형사죠! 그래서 몇몇 언어에서는 명사의 성/수/격에 따라 관형사의 형태가 변한답니다.


다만, 동사의 모습을 바꾸기도 하는 성/수와 달리 격은 오히려 동사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 보니 격이 동사의 모습을 바꾸지는 않죠. 반대로, 동사에 따라 서로 다른 격을 필요로 하는 것을, 격을 "지배/관장govern"한다고 한답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타동사는 대격을 지배하지만, 일부 타동사는 향격이나 여격을 지배하기도 한답니다. "나는 집으로 갔다", "나는 집에 갔다"처럼요. 또, 라틴어 같은 언어에서 {아래에} {위에} {랑} 같은 일부 부사어는 탈격 형태에 명사에만 붙는답니다!


이번 장에서는 명사에 문법적 의미를 담는 방법인 격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조금 어려웠지만, 중요한 개념이었으니 다시 정리한 다음, 다음 장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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