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의 탄생

문자의 역사, 권1

by CCCV 츠스쿠

전주곡

이번 장은 이미 1막 뒤의 막간 소극 「토트와 창힐의 만담」에서 가볍게 다룬 내용입니다. 문자와 관련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해 빠르게 문자의 역사를 훑어봤었죠. 이번 장에서는 본격적으로 문자의 역사를 다뤄보려고 합니다.


1부 — 점토로 그릇을 빚듯

1악장 — 그림

전 세계의 구석기 동굴 유적지 중엔, 각양각색의 동굴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마 음악, 무용, 조소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예술일 회화의 증거입니다.


플라톤은, 예술이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식 이론이지만, 최초의 회화 중 일부는 확실히 현실을 모방하고 있답니다. 돌의 들판을 달려 나가는 녹 무늬의 행렬을 보는 누구나 동물들의 모습을, 창을 든 사람들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죠. 그림은 현실의 무언가를 표현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이모지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그림일 겁니다. �라는 그림에는 {미소/기쁨/동의} 등의 뜻이 담겨 있답니다. 그림은 웃는 얼굴을 나타낼 뿐이지만, 거기서 유래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때로는, 배경을 모르는 사람은 유추할 수조차 없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죠.


이 두 예시를 보면, 그림에 인간이 뜻을 담는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유프라테스강, 나일강, 황하강 등 세계 전역에서 이미 여러 번 일어났답니다.


이유는 다양했지만, 대개 셋 중 하나였답니다. 신의 말을 기록하기 위해서, 또는 거래를 기록하기 위해서, 그리고 바로 세금을 위해서였죠! 물론 세금이 아니라 "사원에 바치는 공물"이었고, 국고가 아니라 "사원 창고"였지만, 공물의 종류 및 수량과 창고의 재고 파악을 위해 최초의 문자가 쓰이고 했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사람들은 그림을 사용해 "정해진" 단어를 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해졌다"라는 사실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양을 그린 그림〈�〉을 {양}으로만 쓰고, {복슬복슬하다}, {희다}, {순하다}의 뜻으로 쓰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전까지는 한 그림이 여러 단어에 대응되었어도(회화문자pictogram), 단어와 그림이 일대일로 대응되면서 우리가 흔히 "문자"라고 부르는 것이 되었죠.


2악장 — 추상화

魚는 물고기를 그린 그림입니다. 위의 뾰족한 머리와 아래의 점 네 개로 표현된 꼬리지느러미가 보이시나요? 꽤 물고기 같이 생기지 않았나요? 人은 두 발로 선 사람이라고 합니다. 딱히 사람처럼 생기지는 않은 것 같지만요. 飛는 새가 날개 치는 모양이라는데,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오늘날의 회화문자인 이모지로 적으면 각 문자는 〈�〉 {물고기}, 〈�‍♂️〉 {사람}, 〈�〉 {날다}라고 적을 수 있겠지만, 옛날 옛적의 회화문자를 생각해 봅시다. 사람마다 그림 실력이 다 다르겠죠? 사람마다 그림을 그리는 법도 다를 겁니다. 그러면 사람마다 굉장히 다른 그림을 그릴 겁니다. 고대의 회화 도구를 생각해 보면, 뭘 그렸는지 못 알아볼 수도 있겠죠.


이런 단점을 줄이기 위해, 그림을 점점 더 간단한 선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추상화"라고 부릅니다. 사물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점이나 선으로만 표현을 하려고 하는 것이 추상화의 과정입니다. 추상화를 통해 �‍♂️에서 人으로 바뀌는 거죠.


추상화의 장점은 누가 쓰더라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자를 직접 써보신 분들께선 아시겠지만, 한자를 잘, 이쁘게 쓰긴 참 힘들죠. 하지만 그림에 비하면야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서로 알아볼 수는 있게 "쓸" 수 있으니까요. 그래요, "그리다"를 넘어선 "쓰다"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뜻만 고정된 것이 아니라, 모양도 고정된 것이죠.


다른 회화문자들도 추상화를 겪어 "문자"가 되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자인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 가장 번성한 문자인 이집트의 신성문자, 회화문자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는 마야 문자 등이 있죠.


이런 "문자"들은 회화문자에서 출발해, 표의문자를 거쳐 표어문자가 되었습니다. 둘의 차이는 어떠한 "개념"을 의미하는지, 어떠한 "단어(형태소)"를 의미하는지의 차이입니다. 둘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지만, 순수한 표의문자라고 불릴 만할 것들은 보통 "문자"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들(숫자, 특수기호 등)이기 때문에, 한자같이 "뜻"을 담는 문자들은 다 표어문자라고 부른다고 여기시면 되겠습니다. 둘의 차이를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여기서부터 시작해 보세요!


문자의 역사를 보시면, 여기까지는 모두 동일한 길을 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이 문자(표어문자)가 된 것이죠. 이제 각 문자들은 각자 지금까지의 한계를 극복하고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2부 — 지혜를 향해서

1악장 — 연상 퀴즈

"굴"이라는 단어를 이모지로 표현해 봅시다. 동굴 같은 게 아니라, 먹는 "굴"을요. 굴 이모지가 없다고 하고, 대신에 조개 이모지〈�〉를 써보죠. 그런데 많고 많은 조개 중에 어떻게 굴만 의미할 수 있을까요?


아하! 동음이의어를 사용하면 되겠네요! "동굴"을 표현하는 이모지를 써보는 건 어떤가요? 조개 이모지 옆에 동굴 이모지를 같이 쓰는 겁니다. 아, 그런데 동굴 이모지가 없군요. 〈�️〉를 쓰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면 굴을 〈��️〉로 적을 수 있겠네요. 아니면, "귤"을 써볼 수도 있죠. 귤 이모지를 써서 〈��〉로 쓰는 겁니다.


마치 연상 퀴즈를 하는 것 같지 않나요? 한 글자는 뜻에 대한 힌트를, 한 글자는 소리에 대한 힌트를 주는 퀴즈를요. 이게 바로 한자가 택한 길입니다. 굴을 뜻하는 한자를 볼까요?

蠔 = 虫 + 豪

이 한자(굴 호)는 왼쪽의 벌레를 뜻하는 한자虫와 소리[호]를 나타내는 오른쪽의 한자豪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문자 체계가 연상 퀴즈라니, 재밌죠? 한자를 만드는 방법은 별개의 장에서 따로 설명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으니, 거기서 더 알아보고, 다음 문자 체계를 봐 봅시다!


2악장 — 분리

(쐐기문자는 상형문자와 비슷한 길을 걷다, 결국 쓰이지 않게 되었으니 상형문자만 설명해 보겠습니다.)


상형문자는 얼핏 보면 한자와 비슷한 길을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상형문자도 뜻을 나타내는 한 글자와 소리를 나타내는 글자 몇 자를 써서 단어를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바로 소리마다 정해진 글자가 있다는 점이죠.


상형문자에서는, 한자와는 다르게 소리마다 정해진 글자가 있습니다. 한자의 예시를 먼저 볼까요?

謝 사례할 사 射 쏠 사
飼 기를 사 司 맡을 사
捨 버릴 사 舍 집 사
渣 찌꺼기 사 査 조사할 사
獅 사자 사 師 스승 사

똑같이 "사"라는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서 각양각색의 한자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형문자는 각 소리마다 (거의) 정해진 문자가 있었죠. 정확하게 3224자가요. 물론, 이집트어는 모음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24개의 자음이었지만요. 몇 가지 예시를 볼까요?

� [b] ([ㅂ]) � [m] ([ㅁ]) � [n] ([ㄴ])

이렇게 각 소리(자음)마다 해당하는 글자가 정해져 있었지만, 신성문자는 한 번도 이런 글자만을 이용해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항상 뜻을 의미하는 글자와 함께 사용했지요. 왜 소리를 나타내는 글자만 쓰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때문에 신성문자는 최초의 표음문자라는 영예를 자신의 후예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3악장 — 귀찮음

이집트 왕국의 변두리, 시나이반도에서는 보석과 구리가 나옵니다. 때문에 이집트 광부들이 많이 가는 곳이었죠. 덕분에 이곳에는 광부들이 돌에 새긴 글들이 발견된답니다. 그런데 이 글들, 꽤나 특이합니다.


분명 상형문자처럼 생겼는데, 똑같은 문자만 쓰고 있습니다. 상형문자처럼 뜻과 소리를 함께 적는 게 아니라, 소리만 적혀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소리만을 적은 문자, 원시 시나이 문자입니다.


지금까지 인류에게 문자는 그림의 연장선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문자는 어디까지나 뜻을 전하는 도구이고, 소리를 같이 적는 것은 보조, 힌트에 불과했죠. 그러나 마침내 소리가 보조적인 지위에서, 무대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소리만 적으면 뜻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한 것입니다.


최초로 표음문자phonogram가 탄생한 것이었죠. 지금까지는 문자에 뜻을 담았다면, 지금부터는 문자에 소리를 담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찌나 효율적이고 혁신적인 발명이었는지, 현대에 이르러서는 쓰이는 거의 모든 문자가 표음문자에 속해있습니다. 더불어, 그 중 거의 모든 문자가 시나이의 돌에 새긴 낙서에서 유래한 것이죠.


물론, 이걸 새긴 광부들이 실제로 이런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신성문자를 단순화시킨, 낙서에 가까운 것이었겠죠. 그러나 이 귀찮음은 문자의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나이반도 위쪽, 가나안의 상인들에게 이 문자는 영수증을 적고 재고 관리를 하는데 분명 편리한 도구가 됐을 것입니다.


4악장 — 상인

가나안의 상인들, 페니키아인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지중해를 항해하며 물건을 거래했습니다. 각지를 누비는 상인들에게 정보는 귀하디 귀한 보물이었죠. 따라서 시나이반도의 문자는 빠르게 페니키아인들 사이에서 퍼졌지요.


페니키아인들은 자신의 언어에 있는 22개의 자음을 표현하기 위해 22개의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다음은 각 글자와 그 소리입니다. (둘째 줄의 문자는 국제 음성 기호랍니다!)

스크린샷 2025-10-14 195611.png

페니키아 문자는 그 자체로 문자적 혁신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뭐, 최초로 쓰는 방향이 고정된 문자이긴 합니다(오른쪽에서 왼쪽 가로쓰기). 진짜 혁신을 담고 있던 문자는 그건 원시 시나이 문자였죠. 하지만 페니키아 문자의 대단한 점은 문자가 아니라 페니키아인에게 있습니다.


세 대륙의 건널목, 가나안에 살던 상인들이었기에 이들의 문자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퍼지게 되었죠. 페니키아 문자는 덕분에 전 세계 문자 대부분의 조상이 되었고, 페니키아 문자의 조상인 원시 시나이 문자와 신성문자도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자로 만들어줬습니다.


그러면 페니키아 문자의 후예로는 누가누가 있을까요?


간주곡

아, 하지만 이들을 만나기에는 이번 장이 너무 길어진 것 같군요. 안타깝게도 다음 장에서 만나봐야겠습니다. 추가로, 상형문자의 후예가 아닌 문자 가족들도 다뤄봐야겠지만, 그건 다음다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럼, 잠시 쉬었다가 다음 장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