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표음문자, 아브자드

문자의 역사, 권2

by CCCV 츠스쿠

간주곡

이번 장은 저번 장의 내용에 이어서 문자, 특히 신성문자 및 페니키아 문자의 후예가 되는 문자들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진화해 나가는 과정을 다룹니다. 전 장을 읽지 않으셨어도 큰 문제는 없으니 가볍게 즐겨주시면 됩니다!


3부 — 몸과 땅이 어찌 둘이리오

1악장 — 현상 유지

최초의 표음문자(소리를 나타내는 문자), 원시 시나이 문자의 직계 후손인 페니키아 문자는 주변 여러 지역에 전해지며 각 언어에 맞는 형태로 변했답니다. 하지만 페니키아 문자 자체도 시간이 흐르며 모양이 변하고, 다른 언어를 적는데 쓰였습니다. 처음에는 각진 모양이었지만, 점차 둥글게 둥글게 글자의 모양이 변했죠.


페니키아 문자는 아람 문자를 거쳐 나바테아 문자로 형태가 조금씩 변한 뒤 아랍 문자가 되었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며 글자가 빠지기도 하고 새로 추가되기도 했지만, 글자의 모습이 변하고, 발음이 조금씩 변했을 뿐,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고대 이집트어, 페니키아어, 그리고 아랍어가 모두 아프리카아시아어족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가, 페니키아어와 아랍어는 셈어파라는 같은 하위 분류에 속하죠. 서로서로 비슷했던 덕분에, 글자가 큰 차이 없이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다음은 페니키아 문자, 아람 문자, 히브리 문자, 그리고 아랍 문자입니다. 넷 모두 셈어파에 속하는 언어를 적는데 사용되었으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더 최신의, 변화를 더 겪은 모습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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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오른쪽 순서로, 각각 IPA(글자의 소리), 페니키아 문자, 아람 문자, 히브리 문자, 아랍 문자입니다. 아랍 문자만 혼자 형태가 독특한 것이 보이지만, 아랍 문자는 아람 문자가 더 둥글둥글해진 나바테아 문자의 필기체에서 유래한 것이니, 가장 구불구불한 것이니 당연한 일이겠죠.


페니키아 문자는, 전 장에서도 말씀드렸듯 세계 최초로 정해진 글쓰기 방향이 있는 문자입니다. 페니키아 문자는 가로로 쓰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적습니다. 이를 오른 우右, 가로 횡橫을 써 우횡서右橫書라고 한답니다. 페니키아 문자의 방향이 우횡서이니, 페니키아 문자의 후손들도 모두 우횡서를 쓰게 되었겠죠?


물론 아니었습니다. 현대에 우횡서로 쓰는 문자들은 거의 모두가 페니키아 문자의 직계 후손들인 히브리 문자, 아랍 문자와 이들과 가까운 친척들이랍니다. 페니키아 문자의 다른 후손들은 페니키아어와 매우 다른 언어를 적는데 쓰이며 원형과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되고, 쓰는 방향도 변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마침 페니키아 문자의 후손 얘기가 나왔으니, 연대를 정리해 볼까요?

페니키아 문자: 기원전 11세기부터 쓰여 점차 후예 문자들에게 대체되다가 기원전 149년, 카르타고(페니키아의 후신)의 멸망으로 쓰이지 않게 됨.


아람 문자: 기원전 8세기 경부터 서아시아에서 쓰이며, 당대 공용어로 쓰이는 아람어를 적는 문자였기에 널리 쓰이며 많은 후예를 두었고, 아람어 자체가 다른 언어로 바뀌며 아람 문자도 서서히 다른 문자로 변화해 기원후 600년까지 쓰임.


히브리 문자: 기원전 2세기 경부터 쓰여 히브리어를 적는데 쓰이며, 유대인의 강제 이주 후 히브리어가 일상 언어로 쓰이지 않게 되며, 히브리 문자 또한 종교용으로만 쓰이다가, 현대 이스라엘국의 성립 이후 히브리어가 일상 언어로 부활하며 히브리 문자도 부활하게 됨.


아랍 문자: 기원후 3세기 경부터 쓰여 아랍어를 적는데 쓰이며, 아랍어가 이슬람교의 확장과 함께 널리 퍼지면서 로마자, 한자를 이어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사람이 쓰는 문자가 됨.


2악장 — 아브자드

페니키아 문자와 직계 후손 문자들의 특징은 "아브자드"라는 것입니다. 아브자드는 아랍 문자의 첫 네 문자를 따온 이름으로, 각 문자의 소리가 /a/, /b/, /d͡ʒ/, /d/이기 때문에 아브자드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래서, 아브자드가 도대체 뭔가요? 순수한 아브자드란, 오직 자음만을 써서 언어를 표기하는 것입니다. 페니키아 문자가 순수한 아브자드였죠. 한국어와 한글로 예시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ㅁㄷ 'ㄴㄱㄴ'ㄴ ㅌ'ㄴㄹ ㄸㅂㅌ ㅈㅣㄹ'ㅁㅣ ㄱ ㅈㄴ'ㅁㄱㅜ ㄱㅜㄴㄹ' 'ㅆ' ㄷㅇㄷㅇㅎㄷ. 'ㄴㄱㄴ'ㄴ ㅊㄴㅂㅈㄱ'ㄹ 'ㅅㅇㄱㅜ ㅣㅇㅅㅁ'ㄹ ㅂㅣㅂㄷ'ㅜ'ㅁj ㅅㄹ ㅎㅣㅈ'' ㅈㅇㅅㄴ'ㄹ ㅎㅇㄷㅇㅎㅣㅣ ㅎㄴㄷ.〉

/모든.인간은.태어날.때부터.자유로우며.그존엄과.권리에.있어.동등하다.인간은.천부적으로.이성과.양심을.부여받았으며.서로.형제애의.정신으로.행동하여야한다/

('는 소리 없음을 강조하는 표기, ㅣ는 반모음 ㅣ, ㅜ는 반모음 ㅗ/ㅜ)

알아보실 수 있으시겠나요? 한국어와는 다르게 페니키아 문자가 이렇게 자음만 썼어도 뭐라고 썼는지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페니키아어의 특징에 있답니다.


페니키아어와, 그 친척 아람어, 히브리어, 아랍어는 셈어파에 속하는 언어로, 고정된 자음이 어근이고, 앞, 뒤, 사이에 붙는 모음이나 다른 자음이 접사인 특이한 문법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무척 흥미롭기 때문에 나중에 다뤄볼 예정이랍니다!) 이런 문자여도 능숙히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글로 쓴 아랍어 예시를 보면서 왜 그럴까 볼까요?

어근: ㅋㅌㅂ {쓰다/적다}

<ㅋㅌㅂ> /카타바/ {(그 남자가) 썼다}
<ㅣㅋㅌㅂ> /야크툽/ {(그 남자가) 쓴다}
<ㅋㅌ'ㅂ> /키타브/ {책}
<ㅋㅌㅂ> /쿠투브/ {책들}
<ㅋ'ㅌㅂㅌ> /카티바트/ {(여자) 작가}
<ㅁㅋㅌㅂㅌ> /마크타바트/ {도서관}
<ㅁㅋㅌㅌㅂ> /무크타티브/ {구독자}

어근에 붙는 접사가 규칙적이기 때문에, 아랍어에 능숙하고, 문자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라면 주위 문맥과 약간의 추측만으로도 적힌 자음만 보고도 무슨 단어를 읽기 바라는 것인지 알아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브자드가 정확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음만 쓰니, 당연히 모호함이 생길 수 밖에 없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페니키아 문자가 아닌 다른 문자들은 여러 해결책을 냈는데, 하나는 자음 글자를 모음으로도 쓰는 방법이었습니다. 이건 언어의 특징이기도 했는데요, /w/와 /j/가 위치에 따라 /u/, /i/로 소리 나기도 했었기 때문이었죠. 특히, 아랍어에서는 모음이 /a/, /i/, /u/의 세 종류(+모음 길이)밖에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글자 위아래에 조그마한 점이나 선을 더해서 이 자음에 따라붙는 모음이 뭔지 표시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자음 위에 짧은 가로선을 그으면 /a/, 자음 아래에 짧은 가로선을 그으면 /i/, 자음 위에 조그만 고리를 그리면 모음 없음을 의미하는 것인 거죠. 이렇게 모음을 표시하는 방법이 있는 아브자드를 비순수 아브자드라고 한답니다. 한글과 비교해 보면 정말로 특이한 체계죠?


간주곡

페니키아 문자의 후예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기원전 8세기 경에 만들어진 두 문자, 아람 문자의 후예와 그리스 문자의 후예들이죠. 두 문자의 후예는 각각 유라시아 반도의 아래쪽, 위쪽을 따라 퍼져나갔답니다.


그리스 문자는 유럽의 여러 문자(로마자, 룬 문자, 키릴 문자 등등)의 조상이랍니다. 그에 비해, 아람 문자는 서아시아의 여러 문자(히브리 문자, 아랍 문자, 페르시아 문자 등등)뿐만 아니라, 남아시아의 여러 문자(브라흐미 문자, 데바나가리 문자, 태국 문자 등등)의 조상이기도 하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아람 문자의 후예 시리아 문자는 소그드 문자와 위구르 문자를 거쳐 몽골 문자, 만주 문자로 이어졌답니다. 즉, 그리스 문자보다는 아람 문자가 훨씬 더 많은 후예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반대로 그리스 문자 계통의 대표 주자, 로마자가 제국주의와 함께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아람 문자 계통의 문자들보다 훨씬 많이 쓰이게 되면서 아람 문자 계통의 사용자 수가 추월당하게 되었답니다.


문자의 역사는 이렇게 재밌고, 이번 장에서 다룬 아브자드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자 체계의 종류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장에 그 내용을 더 담기에는 너무 길기 때문에, 다음 장에서 다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 장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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