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표음문자, 아부기다

문자의 역사, 권3

by CCCV 츠스쿠

간주곡

이번 장은 저번 장의 내용에 이어서 문자, 특히 신성문자 및 브라흐미 문자의 후예가 되는 문자들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진화해 나가는 과정을 다룹니다. 전 장을 읽지 않으셨어도 큰 문제는 없으니 가볍게 즐겨주시면 됩니다!


4부 — 번뜩이는 재치

1악장 ― 연약한 고리

저번 간주곡에서 말씀드렸듯, 남아시아의 여러 문자들은 아람 문자의 후예라고 여겨집니다. 남아시아의 문자들의 공통 조상이 되는 문자는 브라흐미 문자로, 이 때문에 남아시아 문자들을 브라흐미계 문자라고 부른답니다.


그러면 아람 문자에서 브라흐미 문자로 어떻게 변화한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이 부분이 세계 문자 역사에서 취약한 부분이랍니다. 아직 아람 문자에서 브라흐미 문자로 넘어가는 과정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중간 단계의 문자 형태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물론, 중간 단계가 있어야만 확실하게 둘 사이의 연결을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페니키아 문자의 다른 후손들에 비해, 브라흐미 문자는 그 형태가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겼답니다.


브라흐미 문자의 이런 독특함은 일부 학자가 브라흐미 문자는 아람 문자의 후예가 아닌 (아직까지는 해독되지 않은) 인더스 문명의 문자의 후예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브라흐미 문자가 어떻게 생겼길래 그런 걸까요?


첫째로, 브라흐미 문자는 기존의 abc 순서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혹시 지금까지 페니키아 문자를 보시면서 알아차리셨는지 모르겠지만, 페니키아 문자가 처음으로 규정한 abc 순서는 지금까지도 큰 틀에서는 변함 없이 유지되어 왔답니다.


이 덕분에 페니키아 문자의 후예들은(로마자에서 몽골 문자의 조상이 되는 위구르 문자까지) 페니키아 문자와 같은 표(제가 전 장에서 보여드린 방법으로)에 놓고 형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기에 편리합니다.


글자의 소리는 변했지만, 그 순서는 거의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 문자의 후예들과 페니키아 문자를 비교할 때 더 드러나는 특징이죠. 하지만 브라흐미 문자는 이 순서를 유지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순서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순서는 한글과 가나의 글자 순서로 이어지게 되었죠.


둘째로, 브라흐미 문자의 특징, 아부기다 때문입니다. 아부기다가 뭔지는 아래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기존까지의 모든 표음 문자가 아브자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다면, 문자 체계의 종류가 바뀔 정도로 큰 변화를 겪은 문자이니, 아예 다른 문자 계통이 아닐까 의심하는 것도 당연할 수 있겠죠.


셋째로, 브라흐미 문자보다 아람 문자의 특징을 잘 유지한 문자, 카로슈티 문자와의 관계입니다. 카로슈티 문자도 아부기다로, 브라흐미 문자와 거의 동일한 시기(기원전 3~4세기)부터 사용되었기 때문에, 왜 두 문자가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답니다.


만약 아람 문자가 자연스럽게, 천천히 퍼진 것이라면 두 문자 체계가 따로 만들어졌어도, 조금 이상하긴 해도 큰 문제는 아니었겠지만, 아람 문자가 그렇게 퍼진 것이 아니었을 거라는 문제가 있답니다.


아람 문자는, 전 장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서아시아의 공용어, 아람어를 적는데 쓰였답니다. 서아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페르시아 제국)의 공용어로도 아람어가 쓰이며, 페르시아의 영토 전역으로 아람어와 아람 문자가 퍼지면서 각지의 언어도 각자의 문자 체계를 적게 되었고, 이 중에 카로슈티 문자도 있기 때문입니다.


카로슈티 문자는 행정 문서를 적는데 쓰이는 아람 문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아람 문자에서 카로슈티 문자로 이어지는 중간 단계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닌, 급작스럽고 의도적인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이런 추측의 기반 중 하나는 짧은 시간대입니다. 기원전 500년의 아케메네스 왕조의 인도 침략 이후, 200년 동안 중간 단계에 해당하는 문자가 발견되지 않다가, 기원전 300년 경부터 갑자기 완성된 (통일되고 정해진) 형태의 카로슈티 문자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죠. 인도 특유의 구전 문화 때문에 문자의 증거가 남지 않은 것인지, 무엇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답니다.


2악장 — 비슷하지만 다른

미스터리한 기원을 가진 브라흐미 문자의 역사를 읽으시며 잔뜩 기대가 되셨을 테니, 브라흐미 문자와 각 글자의 소리, 그리고 비교하기 위한 페니키아 문자, 아람 문자와, 브라흐미 문자의 가장 대표적인 후예인 데바나가리 문자, 타밀 문자를 봐 봅시다! 왼쪽에서부터, 페니키아 문자, 아람 문자, 브라흐미 문자의 소리, 브라흐미 문자, 데바나가리 문자, 타밀 문자입니다.

브라흐미와 데바나가리, 타밀 문자의 경우 위의 글자의 소리는 모두 자음 + /ɐ/입니다.

뭔가 비슷하면서도 다르죠? 특히, 앞서 말씀 드렸듯 브라흐미 문자는 더 이상 페니키아 문자의 글자 순서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1대1 대응이 아닌, 비슷한 소리를 가진 글자들을 연관 지은 것이라 약간 불확실한 점도 있답니다.


각 문자의 특징을 보면, 브라흐미 문자는 스틱맨/막대 인간과 비슷한 모양(덕분에 옛날에는 "pin-man" 문자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이고, 데바나가리 문자는 특유의 글자들을 잇는 가로줄이 있는 것이 보이고, 타밀 문자는 연약한 잎에 글을 써서 그런지, 글자 둥글둥글하고 곡선이 많은 것이 보인답니다.


또한, 브라흐미 문자와 그 후예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쓰기를 하는, 좌종서랍니다. 이 또한 아람 문자와 다른 점이겠네요. 그러면 연대를 정리해 볼까요? 전 장의 내용도 요약해서, 한 표로 같이 합쳐 봅시다.


페니키아 문자: 기원전 11세기 ~ 기원전 149년


아람 문자: 기원전 8세기 경 ~ 기원후 600년 경


브라흐미 문자: 적어도 기원전 3세기 경에는 완성되었고, 아소카 대왕이 인도를 통일하며 세운 비석인 아소카 칙령들이 기원전 3세기 중반에 세워졌는데, 이때 이미 완성된 형태로 쓰인 것을 볼 수 있음. 언어가 진화하며 후예 문자들로 대체되어 기원후 400년 경까지 쓰임.


히브리 문자: 기원전 2세기 경 ~ 현재


아랍 문자: 기원후 3세기 경 ~ 현재


타밀 문자: 기원후 5세기 경부터 쓰이며, 남부 인도의 여러 언어를 적는데 쓰이고 있다. 브라흐미 문자와 타밀 문자 중간 단계에 있던 문자는 동남아시아로도 퍼져 태국 문자 등의 조상이 됨.


데바나가리 문자: 기원후 12세기 경부터 쓰이며, 북부 인도의 여러 언어를 적는데 쓰이고 있음. 브라흐미 문자의 조상인 싯담 문자는 벵골 문자 같은 후예를 많이 가지고 있으며, 싯담 문자의 조상인 굽타 문자는 파스파 문자 같은 후예가 많음.


3악장 — 아부기다

먼저, 전 장에서 만났던 아브자드에 속하는 문자들이 소리를 어떻게 적는지 다시 한번 되새겨 봅시다. 순수한 아브자드는 오직 자음만을 적고, 모음은 하나도 적지 않는 문자입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브자드를 쓴, 그리고 최초로 표음 문자를 만든 이들의 언어에서는 자음만이 어근이고, 모음은 접사였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모음을 쓰지 않아 생기는 중의성과 모호함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고, 아브자드도 두 방법을 통해 모음을 표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자음을 나타내는 글자를 사용해 모음을 나타내는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음 글자 위아래에 작은 점과 선들을 더해 자음에 붙은 모음을 나타내는 방법이었습니다.


전자의 경우, 초기 페니키아 문자에서 드문드문 쓰이다가, 아람 문자나 히브리 문자에서부터 널리 쓰이게 되어 페니키아 문자보다 빠르게 이 방법을 채용했답니다. 후자의 경우, 아람 문자의 직계 자손인 시리아 문자(기원후 1세기부터 쓰임)에서부터 널리 쓰이게 되었죠.


이제 아부기다를 봐 봅시다. 아부기다는 자음 글자 하나하나에 아예 모음이 딸려있다는, 아주 혁신적인 발상의 전환을 이뤘답니다. 브라흐미 문자 +는 /k/이라는 소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kɐ/라는 소리를 나타내는 것이죠.


한글로 따지면, ㄱ라는 글자의 소리가 /k/이 아니라, /kɐ/(/가/)를 나타낸다고 생각하시면 된답니다. 글자에 음절을 담는 것이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이게 무슨 혁신이냐고 여기실 수 있겠지만, 페니키아 문자의 직계 조상인 신성문자 시절부터 한 글자에는 한 음소(자음)만을 담는 것이 당연했던 표음 문자는, 처음으로 자음과 모음이 만난 한 "음절"을 한 글자에 담게 된 것입니다.


이 다음에 오는 혁신도 대단합니다. 질문을 하나 던져봅시다. /kɐ/가 아니라, /ki/라는 음절을 적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예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도 되겠지만, 그러면 엄청 많은 글자가 필요하겠죠. 대신에, +에 조그만 선을 더해서, 이 음절의 모음이 다른 모음이라는 것을 나타내 봅시다! 음절의 모음이 /u/라면, 글자의 아래에 오른쪽으로 치우친 짧은 선을 더해 보는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브라흐미 문자는 음절마다 서로 다른 10개의 모음을 담을 수 있답니다!

스크린샷 2025-10-14 220847.png

중간의 브라흐미 문자는 각 모음이 단독으로 있을 때(즉, 자음 없이 모음만으로 이루어진 음절일 때) 쓰이는 글자랍니다. 마치 한글이 모음만 있을 때 아무 소리 없는 "ㅇ"을 넣어서 글자의 체계를 안정감 있게 하는 것과 비슷하죠. 오른쪽의 브라흐미 문자는 +의 다양한 형태랍니다. 모든 글자가 /k/로 시작하면서, 서로 다른 음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 글자가 하나의 음절을 나타내며, 글자에 조금씩 다른 표시를 하는 것으로 그 음절의 모음을 바꾸는 문자들을 일컬어 "아부기다"라고 한답니다. 아부기다라는 이름은 똑같은 구조를 가졌지만, 페니키아 문자의 자매 문자인 남부 셈어파 문자에서 유래한 그으즈 문자의 첫 네 소리인 /a/, /b/, /g/, /d/를 합쳐 만들어졌답니다. 사실 신성문자의 후예들은 정말 널리 퍼져서 이런, 제가 다루지 못하는 문자가 많답니다. 다 다루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요.


간주곡

이걸로 브라흐미 문자의 후예들과 아부기다 문자들을 알아봤답니다! 사족으로, 브라흐미계 문자들이 사용하는 모음, 연구개음(무성 무기, 무성 유기, 유성 무기, 유성 유기, 비음 순서, 이하 동일), 경구개음, 권설음, 치경음, 양순음, 접근음(경구개, 권설, 치경, 양순 순), 마찰음(연구개(성문), 경구개, 권설, 치경 순)의 순서는 독특하답니다.


이 순서는 불교와 함께 중국으로, 한국으로, 일본으로 넘어와 한국의 아설순치후 순서, 그리고 현대의 가나다 순서에 영향을 주었고, 일본의 오십음도 순서에도 영향을 주었답니다.


또한, 문자 체계의 가짓수로만 따지면 가장 널리 퍼졌다고 할 수 있는 브라흐미 문자는 그 독특함 덕분에 창작물에서도 자주 모티브로 채용하기도 한답니다. 그러면 이번 장은 이걸로 마치고, 다음 장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이전 02화첫째 표음문자, 아브자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