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표음문자, 알파벳

문자의 역사, 권4

by CCCV 츠스쿠

간주곡

이번 장은 저번 장의 내용에 이어서 문자, 특히 신성문자 및 그리스 문자의 후예가 되는 문자들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진화해 나가는 과정을 다룹니다. 전 장을 읽지 않으셨어도 큰 문제는 없으니 가볍게 즐겨주시면 됩니다!


5부 —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1악장 — 문제 봉착

페니키아 상인들의 문자를 본 기원전 800년대의 그리스의 상인들은 자신들도 문자를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주 큰 장벽에 가로막히게 되었죠. 그리스어는 모음이 중요했답니다. 제가 3막 7장에서 보여드린 것처럼, 아브자드는 아무 언어나 사용할 수 있는 문자 체계가 아니죠. 그리스어도 한국어처럼 아브자드로 적기에는 꽤나 난감한 언어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 상인들은 그리스어와 페니키아어의 큰 차이를 전화위복으로 삼았습니다. 페니키아어에는 존재하던 자음이, 그리스어는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이들 자음을 나타내던 글자들을 재활용해 그리스어의 모음을 적는데 사용했답니다. 페니키아 문자의 �는 /ʔ/이었지만, /a/을 나타내는 글자로 바꿨고, �는 /e/로, �는 /i/로, �는 /o/로, �는 /u/로 재활용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페니키아어에는 없는 자음이 그리스어에는 있는 경우도 있었죠.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새 글자들을 만들면 되겠네요! 왜 모음에서 진작 이러지 않았는지는 의문이지만, 뭐, 이렇게 그리스인들은 새 글자도 만들어 자신의 언어를 적을 수 있는 문자 체계를 만들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문자를 이탈리아반도에 전해줬고, 그렇게 이탈리아반도에 살던 에트루리아인들이 자신의 문자를 로마인에게 전해줬고, 로마인들이 대제국을 세우며 유럽 전역에 로마자가 퍼지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로마자, 우리가 흔히 알파벳이라고 불리는 것이 전 세계에 퍼질 기반이 마련되었죠.


한편, 이탈리아반도에 퍼진 그리스 문자의 후예는 위로도 퍼져 바이킹들의 룬 문자가 되었답니다.


유럽의 동쪽, 그리스 반도 위에 살던 슬라브인들은 그리스 문자를 받아들여 슬라브인들에게 문자를 전파했다고 불리는 키릴 형제의 이름을 딴 키릴 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면 위의 네 문자를 서로서로 옆에 두고 비교해 볼까요? 소리는 다루지 말고요. 오른쪽에서부터, 페니키아 문자, 그리스 문자, 로마자, 키릴 문자랍니다. 룬 문자는 각 글자의 기원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제외했습니다.


기울여진 글자는 이전 문자의 순서에서 바뀐 글자들입니다.
회색 문자들은 일부 지역에서만 쓰인 그리스/키릴 문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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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신기하네요! 글자 사이에 유사성이 잘 보이시나요? 간단하게 잘 보이네요! 지금까지 본 다른 문자 계열보다 원 형태를 더 잘 유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쓰는 방향의 경우, 그리스 문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쓰기, 즉 좌종서를 도입한 이후로 그 후예 문자들도 좌종서로 썼답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그리스 문자도, 로마자도, 고대에는 한 줄 한 줄 번갈아 가며 썼죠. 한 줄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썼으면, 그다음 줄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던 것입니다. 글자 모양도 좌우를 바꿔서요! 덕분에 몇몇 글자가 페니키아에서 그리스로 옮겨갈 때 좌우가 반전된 것이 보이시나요?


이를 그리스인들은 βουστροφηδόν이라고 불렀는데, {숫소가 도는 방식}이라는 뜻입니다. 소가 밭을 갈면서 도는 방식이라는 것이죠. 번역하면 "우경식牛耕式"이 되겠지만, 그보다는 "좌우교대서법"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 것은 아쉽네요. 이후로 두 문자 모두 글을 쓰는 방향을 좌종서 한 방향으로 고정했답니다.


그러면 이들 네 문자도 지금까지의 연대에 추가해 볼까요?

페니키아 문자: 기원전 11세기 ~ 기원전 149년


아람 문자: 기원전 8세기 경 ~ 기원후 600년 경


그리스 문자: 기원전 8세기 경부터 서서히 여러 변종이 나타나며, 기원전 4세기 경에 현재의 모습으로 고정되었고, 이후로도 그리스 문화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그리스 밖에서도 널리 쓰이며, 그리스어가 동로마 제국의 공용어가 되며 전성기를 누리다가,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후 지금은 다시 그리스에서만 쓰이는 문자가 되었음. 하지만 고대의 문화를 바탕으로도 지금도 글자 자체는 수학, 과학, 예술을 가리지 않고 널리 활용됨.


로마자: 기원전 7세기 경부터 쓰이기 시작해, 로마 제국이 번성하며 지중해 전역과 서유럽에 퍼졌다가, 제국주의의 시대 때 또 한 번 폭발적으로 확산하며 전 세계에 퍼짐.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문자임.


브라흐미 문자: 기원전 3세기 경 ~ 기원후 400년 경


히브리 문자: 기원전 2세기 경 ~ 현재


룬 문자: 기원후 2세기 경부터 이탈리아의 문자를 게르만인이 받아들여 변형해 사용하기 시작한 문자로, 다양한 변종이 있으나, 대부분 중세 시대(10세기를 전후로 한 세기) 때 로마자에 대체되었고, 극히 일부의 룬 문자가 19세기까지 살아남음.


아랍 문자: 기원후 3세기 경 ~ 현재


타밀 문자: 기원후 5세기 경 ~ 현재


키릴 문자: 기원후 10세기 경, 불가리아 제1제국 시절 만들어져, 슬라브인들의 문자가 됨. 현재도 슬라브어족에 속하는 많은 언어들(러시아어, 불가리아어, 우크라이나어, 세르비아어 등)을 적는 문자로도 쓰이며, 소련의 영향으로 중앙아시아의 여러 언어(몽골어, 카자흐어, 우즈베크어 등)를 적는데도 쓰임.


데바나가리 문자: 기원후 12세기 경 ~ 현재


2악장 — 알파벳

드디어 알파벳입니다! 아브자드도, 아부기다도, 둘 다 처음 들어보셨겠지만, 알파벳이라는 단어는 다들 한 번쯤은 들어본 단어죠! 특히나, 로마자(abc)를 흔히 알파벳이라고 부르니 더더욱이요.


알파벳이라는 단어는 그리스 문자의 별칭이었는데, 그리스 문자의 첫 두 글자, 알파α와 베타 β를 합친 단어랍니다. 이후로 알파벳이라는 단어는 "문자 체계"를 일컫는 다른 말이 되었답니다. 정확히는, 한 언어를 적는 데 쓰는 글자들을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한국어로는 그리스 문자, 페니키아 문자, 하고 부르지만, 영어로는 그리스 알파벳, 니키아 알파벳이라고 부른답니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며 언어학이 발전하고, 유럽인들이 다른 언어를 배우게 되자, 유럽의 언어학자들은 언어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적는 방법이 판이하게 다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 문자 체계의 특징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붙여주었죠. 표음 문자, 표어 문자, 이런 식으로요. 그리고 표음 문자, 그중에서도 각 음소를 적는 방법이 있는 문자들을 알파벳, 아브자드, 아부기다로 달리 부르게 되었답니다.


재밌는 것은 이 세 분류가 페니키아 문자 후손들의 가계도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다는 것이죠. 페니키아어, 나아가 아람 문자의 직계 후손들은 아브자드, 브라흐미 문자의 후손들은 아부기다, 그리고 그리스 문자의 후손들은 알파벳이 된 것입니다. 물론, 몽골 문자처럼 아람 문자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알파벳이 된 사례도 있죠.


그러면 알파벳은 다른 문자들과 다른 무슨 특징이 있길래 알파벳이라는 단어를 분류로 쓸 수 있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문자의 역사』 미니 시리즈를 봐오셨다면, 이젠 알 수 있으시겠죠, 바로 모음입니다! 아브자드처럼 모음을 표시 안 하거나, 아부기다처럼 모음을 자음에 딸린, 음절의 일부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모음을 나타내는 글자를 따로 두는 것이 바로 알파벳입니다.


당장 위에서도, 그리스인이 어떻게 페니키아 문자 중 글자 몇 자를 떼어 와서 재활용해 모음을 나타내게 했는지 잠깐 알아봤었죠(사실 페니키아 문자에서 그리스 문자, 로마자로 넘어가는 과정을 꽤 흥미로워 따로 다뤄도 좋을 정도랍니다). 이런 그리스인의 개혁은 알파벳이라는 새로운 문자 체계의 종류를 만들게 되었답니다.


다행히도, 페니키아 문자에서 그리스 문자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가 있고, 위에서도 보다시피 순서도 대부분 일치해서, 브라흐미 문자처럼 페니키아 문자와의 연관성을 의심할 필요도 없네요.


마침 알파벳이라는 이름도 나왔으니, 글자의 이름이란 것도 볼까요? 대부분의 문자에서, 각 글자에는 이름이 없답니다. 당연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이, 그 글자의 소리를 읽는 것이 곧 그 글자의 이름이니까요. 하지만, 표음문자는 상형문자에서 유래했고, 상형문자에는 각 글자마다 이름, 정확히는 그 글자가 상징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자를 예로 들면, 魚를 물고기라고 부르는 것이죠.


원시 시나이 문자도, 페니키아 문자도, 사람들은 각 글자가 원래는 어떠한 물체의 모습을 본뜬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각 글자들을 그 물체의 이름으로 불렀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차 모양이 변하고, 물체와의 연관성도 떨어지자 그렇게 잘 부르지 않게 되었죠.


페니키아 문자의 직계 후손들은 아니지만, 브라흐미 문자의 후손들도, 그리스 문자의 후손들도, 그냥 그 글자의 소리를 이름으로 정했답니다. 하지만 그리스 문자만은 페니키아식 이름을 보존하고 있죠. 그래서 α를 "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알파"라고 불러주는 거랍니다. 관련 내용도 언제 한번 다뤄보면 좋겠네요.


또 하나 그리스 문자의 후예라면 있는 특징이 대문자와 소문자랍니다. 모든 그리스 문자의 후예가 대문자와 소문자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유명한 문자라면 둘 다 가지고 있죠. 원래 대문자만 있었으나, 돌에 깎는 데에 최적화된 대문자를 양피지에 쓰는 것이 힘들어, 둥글둥글하게 바꾼 것이 소문자랍니다.


그러면 그리스 문자의 후예가 아닌 문자 중에서도 알파벳이 있을까요? 위에서도 말한 몽골 문자가 알파벳이랍니다. 소그드 문자는 완전히 아브자드였고, 그 후예 위구르 문자는 아브자드와 알파벳의 성격을 모두 띠었다면, 위구르 문자의 후예 몽골 문자는 확실히 알파벳으로 변하고, 이는 만주 문자에까지 이어졌죠.


그런 알파벳 중 또 다른 예시는 바로, 한글입니다! 한글도 알파벳이죠! 자음과 모음을 각각 개별 글자로 표시하니까요! ㄱㄴㄷ 같은 것은 자음, ㅏㅡㅣ 같은 것은 모음이니까요.


간주곡

여기까지 오는 데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상형문자와 페니키아 문자, 그 후손의 대표 격인 아람문자, 브라흐미 문자, 그리스 문자. 이렇게 우리는 문자의 시작부터, 회화문자, 상형문자, 표의문자, 표어문자, 표음문자, 그중에서도 아브자드, 알파벳, 아부기다를 다뤄봤습니다. 정말 멀고도 멀었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답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표어문자, 한자를 제대로 다뤄보지도 못했고, 보기 힘든 표음문자인 음절문자도 하나도 못 다뤘답니다. 그리고 보통 언어의 역사를 다룰 때 종착점으로 꼽는 자질문자 한글까지!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한다지만, 그래도 너무 많이 남은 게 아닌가요?


그래도, 조금씩 힘을 내어 한 장 한 장 나아가면 곧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장은 여기서 마치고, 다음 장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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