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의 역사, 권6
이번 장은 저번 장의 내용에 이어서 문자, 특히 음절문자(구결자와 가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룹니다. 전 장을 읽지 않으셨어도 큰 문제는 없으니 가볍게 즐겨주시면 됩니다!
紫布岩乎邊希
執音乎手母牛放敎遣
吾肹不喩慚肹伊賜等
花肹折叱可獻乎理音如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거든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 헌화가(양주동의 해석)
위 시는 한자로 적혔으니, 분명 한문(상고한어)으로 적혔겠죠? 그러니 각 한자의 뜻에 맞춰 위 시의 첫 줄을 해석해 볼까요?
紫布岩乎邊希 → 자줏빛 자, 베 포, 바위 암, 어조사 호, 가 변, 바랄 희
자줏빛, 바위, 가 정도는 알아볼 수 있고, 어조사야 문법적 기능이라고 해도, 베 포나 바랄 희는 왜 있는 것이죠? 혹시 이 시는 한문으로 적히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바로 그렇답니다. 이 시는 "고대 한국어"로 적힌 것이죠.
이런 시는 "향가"로, 신라시대부터 초중기 고려시대까지 쓰인 우리말 시의 한 갈래랍니다. 향가는 한글의 창제 이전에 쓰인 만큼 당대에 동양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던 문자, 한자를 가지고 그때의 우리말을 적는 방식, "향찰"을 사용해 적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한문을 읽는 방식으로는 읽을 수 없는 것이죠. 마치 다음의 예시 같은 것입니다.
올 휴먼 비잉즈 아 본 프리 앤 이퀄 인 디그니티 앤 라이츠. 데이 아 인다우드 위드 리즌 앤 콘천스 앤 슐드 액트 투워즈 원 어나더 인 어 스피릿 오브 브라더후드.
아무리 한글을 잘 안다고 해도, 무슨 언어로 적혔는지를 모르면 소리만 알 수 있지, 뜻은 하나도 모르는 것과 같답니다. 위의 예시는 영어를 한글로 적은 것이고, 헌화가 같은 향가는 고대 한국어를 한자로 적은 것이죠.
하지만, 한자는 표어문자로, 글자 하나에 여러 소리가 있는 복잡한 문자랍니다. 예를 들어, 岩이라는 글자를 보고, /바위/라고 읽을 수도 있고, /암/이라고도 읽을 수 있는 것이죠. 전자는 한국어 {바위}에서 유래한 소리고, 후자는 중고한어 /ŋˠam/에서 유래한 한국 한자음 /암/에서 유래한 소리랍니다. 향찰은 한자가 소리를 적을 수 있는 이 두 방법을 모두 활용한답니다.
다른 향가인 서동요의 한 부분을 예시로 볼까요?
善化公主主隱 | 착할 될 귀할 주인 주인 숨을 | 선화공주주은
위는 한자 표기, 가운데는 한자의 뜻, 아래는 한자의 현대 한국 한자음입니다. 善化公主는 서동 설화에서 서동과 결혼하게 된 선화공주를 뜻하는 것일 겁니다. 그럼 뒤의 主隱은 뭘까요? 主를 존칭 접미사 "-님"으로 해석하고 隱을 뜻이 아닌 소리만 따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선화공주님은"을 적으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할 수 있답니다.
이렇게 한자의 뜻을 따오기도 하고(主), 한자의 음만 따오기도 하며(隱) 고대 한국어를 적는 방법이 향찰이랍니다. 하지만, 향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답니다.
하나는 뜻을 따온 건지, 음만 따온 건지 감으로만 알아맞혀야 한다는 것이죠. 옛사람들께서 뭔가 표시라도 했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시지 않았답니다.
두 번째 문제점은 너무 귀찮다는 점입니다. 한국어에서 주구장창 쓰이는 조사 "-은"을 적기 위해서 매번 隱이라는 글자를 귀찮게 적어야 하는 것이죠.
이 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바로 구결자랍니다. 한자의 한 부분만을 떼어와, 소리를 나타내는 글자로 쓰는 것이죠. 예시로, 한국어에서 많이 등장하는 단어 "하다"를 봅시다. "~하다"의 뜻으로 많이 쓰이는 이 단어를 한자로 적기 위해서는 할 위爲(약자 為)를 매번 적어줘야 했죠.
이러면 너무 귀찮으니, 為에서 첫 두 획만 쓴 丷를 대신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얼굴 면面에서 첫 두획만 쓴 丆를 사용해서 어미 "-면"을 같이 써서 丷丆이라고 적으면 "~하면"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죠. 愛丷丆이라고 적으면 "사랑하면"이라는 한국어를 적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구결자는 한글 이전, 한국어의 "소리"를 적을 수 있는 표음문자였지만 현대 한국어를 적기 위해 구결자를 쓰지는 않죠. 가장 큰 이유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죠. 한글의 창제 때문에 구결자가 쓰이지 않게 된 것은 아닙니다.
한글 이후에도 한자 옆에 구결자를 써서 적는 방식은 널리 쓰였습니다. 일부 구결을 한글로 쓰는 사례가 있긴 했지만, 구결자의 획수가 더 적은 경우가 더 많아(예를 들면 <丷丆>과 <하면>), 더 쓰기 편한 구결자를 쓰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이후에 한글이 널리 쓰이게 되고, 한자를 더 이상 한글과 같이 쓰지 않게 되며 한국어 한자 표기에서 단축키 역할을 하던 구결도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된 것이랍니다.
덕분에 구결을 컴퓨터에서 쓰는 것도 어려워졌죠. 하지만, 구결자를 아직도 활발히 쓰는 언어가 있으니, 바로 일본어랍니다.
篭毛與 美篭母乳 布久思毛與 美夫君志持
此岳尓 菜採須兒 家吉閑 名告紗根
虚見津 山跡乃國者 押奈戸手 吾許曽居
師吉名倍手 吾己曽座 我許背齒告目 家呼毛名雄母
코모요 미코모치 후쿠시모요 미부쿠시모치
코노워카니 미츠마스코 이쿠키카나 나노라사네
소라미츠 야마토노쿠니하 오시나베테 와레코소워레
시키나베테 와레코소마세 와레코소하노라메 이헤워모나워모
바구니 바굼 들고 호멩이를요 호멩이를 들고
이 언덕에서 나물 캐는 애 집안 말해요 이름 말해요
(의미 불명) 야마토란 나라는 모두 통틀어 내가 다스리네
모두 통틀어 내가 지배하네 짐이야말로 밝힐까 집안도 내 이름도
— 만요슈 中 1권 잡가 제1수, 이연숙 역
이 시도 적히기는 한자로 적혔지만, 한문을 적은 것이 아니랍니다. 그랬다면 여기 예시로 등장하지도 않았겠죠! 대신, 이 시는 한자로 상대上代 일본어를 적은 것입니다. 셋째 줄 세 번째 구를 볼까요?
押奈戸手 → 누를 압, 어찌 내, 집 호, 손 수
이게 어떻게 "모두 통틀어"의 뜻이 되겠습니까? 이러니, 한문을 적은 것이 아니라, 다른 언어, 이 경우에는 상대 일본어를 적은 것일 수밖에 없죠. 한자만을 사용해서, 한문이 아닌, 다른 언어를 적었다? 친숙하지 않으신가요? 네, 맞습니다. 이 시도 향찰과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여 적힌 것이랍니다. 그러니, 같은 구를 향찰의 방식인, 한자의 뜻과 소리를 둘 다 사용해 읽어 봅시다.
押奈戸手 | 오시 이칸 헤 테 | 밀다 어찌 집 손 | 쿄우 나 고 슈
위에서부터, 한자 표기, 해당 한자의 일본어 뜻을 일본어로 읽은 것, 일본어 뜻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 그리고 해당 한자의 일본식 음입니다. 奈만 음으로 읽고, 나머지는 다 뜻으로 읽으면 오시나헤테가 되고, "헤"가 이런 상황에서는 "베"로 변하니, 상대 일본어 "오시나베테"를 적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향찰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방식을 "만요가나"라고 한답니다. 가나는 일본의 문자인 히라가나, 가타카나의 가나이고, 만요는 만요슈의 만요를 뜻하는 것이랍니다. 만요슈에서 쓰이는, 일본어를 적는 방법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만요가나도 향찰과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니, 동일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래서, 한국과 동일한 해결법을 내놓았죠. 한국에서 한자를 간략화시켜 구결자를 만든 것처럼, 일본에서도 한자를 간략화해 가나를 만들었답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죠. 먼저, 가나에는 두 종류가 있답니다. 하나는 가타카나, 하나는 히라가나입니다. 가타카나가 조금 더 먼저 등장했으니, 가타카나를 먼저 볼 까요?
가타카나는 기원후 800년대의 승려들이 불경을 읊는 것을 쉽게 하기 위해 한자의 일부를 떼어내어 만든 기호입니다. 한자의 일부를 떼어냈다는 점에서, 한국의 구결과 매우 유사하죠.
히라가나도, 기원후 800년대에부터 주로 쓰이기 시작했는데, 히라가나는 그 유래가 한자의 초서체(필기체/흘림체)를 더 간략화한 것이기 때문에 형태가 구결이나 가타카나와는 약간 다릅니다. 그리고, 각 글자마다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도 다르지요.
거기에 더해, 지금의 히라가나가 정립된 1922년 전까지는 다양한 한자의 다양한 초서체에서 유래한 히라가나를 썼기에, 가짓수도 가타카나보다 훨씬 많았죠. 물론, 가타카나도 다양한 형태가 있었지만, 히라가나보다는 훨씬 적었고, 적게 쓰였답니다.
그러면, 가타카나와, 히라가나, 그리고 각 가나의 유래가 된 한자를 서로 놓고 비교해 볼까요?
あ 安의 초서 | ア 阿의 阝
い 以의 초서 | イ 伊의 亻
う 宇의 초서 | ウ 宇의 宀
え 衣의 초서 | エ 江의 工
お 於의 초서 | オ 於의 方
か 加의 초서 | カ 加의 力
き 幾의 초서 | キ 幾의 戈
く 久의 초서 | ク 久의 ク
け 計의 초서 | ケ 介의 ケ
こ 己의 초서 | コ 己의 コ
さ 左의 초서 | サ 散의 卄
し 之의 초서 | シ 之의 之
す 寸의 초서 | ス 須의 ハ
せ 世의 초서 | セ 世의 セ
そ 曽의 초서 | ソ 曽의 丷
た 太의 초서 | タ 多의 夕
ち 知의 초서 | チ 千의 チ
つ 川의 초서 | ツ 川의 ツ
て 天의 초서 | テ 天의 テ
と 止의 초서 | ト 止의 卜
な 奈의 초서 | ナ 奈의 �
に 仁의 초서 | ニ 仁의 二
ぬ 奴의 초서 | ヌ 奴의 又
ね 祢의 초서 | ネ 祢의 礻
の 乃의 초서 | ノ 乃의 ノ
は 波의 초서 | ハ 八의 ハ
ひ 比의 초서 | ヒ 比의 匕
ふ 不의 초서 | フ 不의 フ
へ 部의 초서 | ヘ 部의 ⻏
ほ 保의 초서 | ホ 保의 木
ま 末의 초서 | マ 末의 二
み 美의 초서 | ミ 三의 ミ
む 武의 초서 | ム 牟의 厶
め 女의 초서 | メ 女의 メ
も 毛의 초서 | モ 毛의 モ
や 也의 초서 | ヤ 也의 ヤ
ゆ 由의 초서 | ユ 由의 ユ
よ 与의 초서 | ヨ 與의 习
ら 良의 초서 | ラ 良의 ラ
り 利의 초서 | リ 利의 刂
る 留의 초서 | ル 流의 儿
れ 礼의 초서 | レ 礼의 乚
ろ 呂의 초서 | ロ 呂의 口
わ 和의 초서 | ワ 和의 ワ
ゐ 爲의 초서 | ヰ 井의 ヰ
ゑ 恵의 초서 | ヱ 恵의 ヱ
を 遠의 초서 | ヲ 乎의 ヲ
ん 无의 초서 | ン 尓의 �
안타깝게도, 컴퓨터에서는 초서체를 적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에 히라가나와 한자 사이에 관련성이 잘 안 보이죠. 가타카나도, 왜 이 한자가 이렇게 되는 건지 모르겠는 것들도 많고요. 나무위키 가타카나 문서와 히라가나 문서에 더 좋은 시각 자료가 있으니, 참고해 보시는 것은 어떤가요?
가나는, 한자 한 글자를 떼어와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한 글자마다 한 음절이 통째로 들어있답니다. 이렇게 한 글자마다 한 음절을 통째로 나타내는 것을 음절문자라고 부르죠. 예를 들면, か는 [카]라는 한 음절을 통째로 나타내고 있답니다.
물론, 가나는 완벽하게 순수한 음절문자는 아니랍니다. 발음 ん으로 비음인 받침을 표시하기도 하고, っ로 뒤에 있는 자음을 중복하기도 하며, ゃ, ゅ, ょ를 사용해 모음 앞에 접근음 [j]를 집어 넣기도 하죠. 이는 음절의 개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글자는 그럴 수 없는 한계 때문이기도 하답니다.
일본어처럼 대부분의 음절에 받침(말음)이 없는 언어라도, 두음에 자음 하나, 음절핵에 모음 하나만 넣더라도 자음 수 × 모음 수만큼의 글자가 필요하죠. 여기에 말음이 추가되고, 모음의 가짓수가 늘어나고, 두음에 자음이 하나 이상 들어가게 된다면, 필요한 글자의 수가 끝도 없이 늘어날 테니, 순수한 음절문자로만 언어를 적는 것은 순수한 아브자드만 사용해서 적는 것보다 더 어렵답니다.
일본은, 한국과는 다르게 구결자에 해당하는 가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한자를 쓰지 않는 상황에서도 가나를 사용하며, 가나를 한자에서 독립적인 것으로 쓰기 시작했답니다. 가나라는 이름은 한자로 仮名으로, 임시/가짜 글자라는 뜻입니다. 한자는 이에 대비되는 표현으로 마나真名라고 불렀죠. 진짜 글자라는 뜻으로요.
실제로, 한자를 생략하고, 흘려 쓰고, 단순화해서 만든 글자고, 한자로 표기하기 귀찮은 문법적 요소(어미, 조사 등)를 적은 글자니 그런 이름이 붙었을 법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완전히 독립적인 글자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구결자를 계속 활용하며 일본과 같은 길을 걷는 대신, 완전히 새로운 글자의 등장으로 일본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죠. 바로, 한글입니다.
아, 하지만 벌써 이렇게나 이번 장이 길어져 버렸으니, 한글에 대한 내용은 다음 장에서 다뤄봐야 할 것 같네요. 물론, 한글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계실 테니,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주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번 장은 이걸로 마치고, 다음 장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