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표음 문자, 자질 문자

문자의 역사, 권7

by CCCV 츠스쿠

간주곡

이번 장은 저번 장의 내용에 이어서 문자, 특히 자질문자(한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룹니다. 전 장을 읽지 않으셨어도 큰 문제는 없으니 가볍게 즐겨주시면 됩니다!


8부 — 나라의 말이 문자와 달라

1악장 — 복습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한 과정이야 워낙 유명하고, 널리 다뤄졌으며, 언어학보다는 역사학에 더 가까우니, 창언창안에서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한글이 자질문자라서 가지는 특징을 알아봅시다!


일단, 당대의 언어학(특히 음운론) 지식을 들여다봅시다. 자음 위주로요!


당대 동양의 음운론은 자음을 크게 두 척도로 나눴습니다. 하나는 소리가 나는 지점이고, 하나는 소리를 내는 방식입니다. 현대 음운론에서도 비슷하지만(2막 7장 참고), 현대 음운론에서 말하는 조음 방식과 이 시절 음운론에서 말하는 소리를 내는 방식은 약간 다르답니다. 훈민정음해례본의 설명을 볼까요?

ㄱㄷㅂㅈㅅㆆ,為全清。
ㅋㅌㅍㅊㅎ,為次清。
ㄲㄸㅃㅉㅆㆅ,為全濁。
ㆁㄴㅁㅇㄹㅿ,為不清不濁。

ㄱㄷㅂㅈㅅㆆ는, 완전히 맑다. (전청)
ㅋㅌㅍㅊㅎ는, 그다음으로 맑다. (차청)
ㄲㄸㅃㅉㅆㆅ는, 완전히 흐리다. (전탁)
ㆁㄴㅁㅇㄹㅿ는, 맑지도 흐리지도 않다. (불청불탁)

완전히 맑다? 맑지도 흐리지도 않다? 이게 다 무슨 말일까요? 기본적으로는, 유성음(성대를 울리는 소리)과 무성음(성대를 울리지 않는 소리)을 구분하는 말입니다. 중국어에서는, 무성음을 전청, 유성음을 전탁으로 분류하였죠.


그리고 차청은 유기음(숨을 강하게 내쉬는 소리)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중국어와 한국어 모두 무성유기음만 있고 유성유기음은 없었기에, 차청이라고 지칭한 것 같네요.


불청불탁의 경우, 중국어에서는 본래 차탁(그 다음으로 흐리다)이라고 했지만, 세종은 왠지는 모르겠지만 이 용어를 불청불탁이라는 용어로 대체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분류를 보았을 때 차탁이라면 유성 유기음이어야 했겠지만, 실제로는 공명음(비음, 접근음, 탄음 등)인 자음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이렇듯 당대 음운론에서는 파열음, 마찰음, 파찰음과 나머지를 분리해, 전자는 유성음, 무성무기음, 무성유기음, 이 셋으로 나눈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소리가 나는 지점은 어떨까요? 이 점은 현대와 별 차이 없답니다. 훈민정음의 맨 앞부분,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부분이 끝나자마자 바로 각 글자의 소리를 알려주며 예시 한 글자를 드는데요, 거기에 보면,

ㄱㄲㅋㆁ는 어금닛소리(아음),

ㄷㄸㅌㄴ는 혓소리(설음),

ㅂㅃㅍㅁ는 입술소리(순음),

ㅈㅉㅊㅅ는 잇소리(치음),

ㆆㅎㆅㅇ는 목구멍소리(후음),

ㄹ은 반혓소리(반설음), ㅿ는 반잇소리(반치음)

라고 설명한답니다. 각각 현대 음운론에 대응되는 위치를 보면, 아음은 연구개음, 설음은 치경음, 순음은 양순음, 치음 또한 치경음, 후음은 성문음이랍니다. 설음과 치음이 둘 다 치경음인데 무슨 차이가 있냐고 하신다면, 치음에는 마찰(이 사이로 쉿쉿하고 새어나오는 소리)이 있고, 설음에는 없는 것이죠.


즉, 현대에는 조음 위치, 조음 방법, 성대의 울림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것에 비해, 당대 음운론에서는 셋을 조금씩 섞어 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리 나는 지점과 소리 내는 방식이 중요한 이유를 볼까요? 먼저, 훈민정음에서는 소리가 나는 지점의 형태를 본떠, 즉 상형문자의 방식으로 각 자음을 만들었죠.

牙音ㄱ,象舌根閉喉之形。舌音ㄴ,象舌附上腭之形。
脣音ㅁ,象口形。齒音ㅅ,象齒形。喉音ㅇ,象喉形。

아음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형상을 본떴다. 설음 ㄴ은, 혀가 윗잇몸에 붙는 형상을 본떴다.
순음 ㅁ은, 입의 형상을 본떴다. 치음ㅅ은, 이의 형상을 본떴다. 후음ㅇ은, 목구멍의 형상을 본떴다.

ㄱ은 혀의 뿌리가 연구개(입천장 뒤쪽)에 닿는 모습을 옆에서 본 것, ㄴ은 혀가 이 뒤에 닿는 모습을 옆에서 본 것, ㅁ는 입술을 다문 모습을 앞에서 본 것, ㅅ은 이의 모습을 앞/옆에서 본 것, ㅇ은 목구멍을 벌린 모습을 본뜬 것이죠.


하지만 한글을 자질문자로 만들어 주는 점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2악장 — 자질

ㅋ比ㄱ,聲出稍厲,故加畫。

ㅋ은 ㄱ에 비해서, 소리가 자못 거칠게 나가므로, 획을 더한다.

훈민정음해례에서, 전청과 차청을 비교하며, 소리가 자못 거칠게 나가므로(기식이 있으므로), 획을 더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하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의 문자의 역사에서 되돌아봅시다.


먼저, 물체를 그림으로 그립니다. 그림을 추상화해 글자로 만듭니다. 그 글자의 뜻을 말하는데 쓰이는 소리를 활용해, 다른 소리를 적습니다. 글자가 없다면, 기존의 글자를 이리저리 돌려보거나, 단순하게 또는 복잡하게 만들거나, 완전히 새로운 글자를 만듭니다.


이런 과정에서, 글자를 바꿔 새 글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일관된 체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글은 달랐습니다. 다음의 체계를 봅시다.

ㆁ? ㄱ->ㅋ, ㄱ→ ㄲ

ㄴ->ㄷ->ㅌ, ㄷ->ㄸ

ㅁ->ㅂ->ㅍ, ㅂ->ㅃ

ㅅ->ㅈ->ㅊ, ㅈ->ㅉ

ㅇ->ㆆ->ㅎ, ㅎ→ㆅ
(ㅊ과 ㅎ은 원래 ㅗ이 아닌 = 형태랍니다.)

ㆁ을 제외하고, 각 조음 위치의 불청불탁에 획을 더하면 전청음이 나오고, 전청음에 획을 더하면 차청음이 나오며, 전청음을 두 번 반복해 쓰면 전탁음이 나옵니다.


ㄱㄷㅂㅈㅅㆆ을 전청, ㅋㅌㅍㅊㅎ을 차청, ㄲㄸㅃㅉㅆㆅ을 전탁, ㆁㄴㅁㅇㄹㅿ을 불청불탁으로 묶었을 때, 규칙성이 보였던 것(특히 전탁에서)도 당연하네요!


이렇듯, 글자 자체에 자질(이 경우에는 소리의 맑고 흐림, 청탁)이 담겨 있을 때, 이 글자를 자질문자라고 부른답니다. 한글의 경우에는 자음에서 획을 더하면 불청불탁 → 전청 → 차청의 순서로 움직이는 것이죠.


물론, 한글의 모음에서도 자질문자적 특징이 조금 나타나긴 합니다. 선이 튀어나온 방향에 따라 양성/음성 모음을 나누는 것이 그 특성이죠. 그러나, 자음에서 이러한 특징이 더 잘 드러난답니다.


자질문자는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체계랍니다. 당연하기도 한 것이, 문자의 역사를 보면 지금까지 각 글자가 담는 정보량이 더 미세해지는 추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표어문자들은 글자에 단어가 담겼고, 표음문자에는 글자에 음소가 담겼죠. 그리고 이제, 자질문자에는 글자에 자질이 담기게 되었답니다. 음소보다도 더 미세한, 음소 사이의 차이를 담은 글자가 바로 자질문자랍니다.


한글이 아닌 다른 자질문자가 있을까요? 흔치는 않지만, 다 근대에 들어와 만들어진 문자들이랍니다. 사실, 자질문자 자체가 언어학에 대한 일정량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만큼, 지금까지 저희가 다뤄왔던 문자처럼 자연적으로 생겨나긴 어렵답니다. 그렇다고 한글만이 만든 사람과 년도가 정확한 문자는 아니죠. 키릴 문자, 파스파 문자, 태국 문자 등도 만든 사람이나 년도가 알려져 있답니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생겨난 문자에도 자질적 특성이 생기기도 하는데요, 대표적인 것이 로마자의 발음 구별 기호diacritic [다이어크리틱]와, 가나의 탁점입니다.


발음 구별 기호는 본래 다양하게 읽을 수 있던 글자의 위아래에 붙어, 그 글자의 소리를 하나로 고정해주는(구별해주는) 기능을 하던 것인데요, 일부 문자 체계에서는 이 구별 기능이 자질적이랍니다.


예시로는 독일의 움라우트(a o u가 ä ö ü가 되면 혀의 위치가 위/앞쪽으로 이동), 폴란드의 크레스카(c n s z가 ć ń ś ź가 되면 조음 위치가 치경에서 경구개로 이동), 튀르키예의 모음 위 점(ı o u가 i ö ü가 되면, 혀의 위치가 앞으로 이동)이 있답니다.


가나의 탁점은 청음(무성음)을 탁음(유성음)으로 바꿔주는 기능으로, 한글에서 획을 더하면 전청이 차청이 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랍니다. 저번 장에서 봤던 모든 가나는 청음으로, 일부 글자에 탁점을 더하면 탁음이 되죠(ハ에서 バ로). 추가로, 몇몇 글자는 반탁점을 더해 반탁음으로 만들 수도 있답니다(パ).


이렇게 회화문자에서부터 시작해 자질문자까지, 문자의 역사를 다룬 7장짜리, 8부작이 여기서 막을 내립니다. 하지만, 막을 내리기 전에, 지금까지의 여정을 다시 한번 돌아봐 볼까요?


후주곡

신성문자: 기원전 33세기 경 ~ 기원후 400년 경. 표어문자로, 회화문자에서 시작해 표어문자로 바뀌었다가, 일부 표음문자적 특징을 발달함. 원시 시나이 문자, 나아가 전세계 대다수 문자의 직계 조상.


한자: 기원전 13세기 경 ~ 현재. 표어문자로, 회화문자에서 시작해, 표어문자로 바뀌었다가, 일부 표음문자적 특징을 발달했으나, 중국어의 특성 덕분에 표어문자적 특징을 신성문자보다 더 잘 보존함.


원시 시나이 문자: 기원전 19세기 ~ 기원전 16세기. 아브자드로, 신성문자를 대폭 간략화해 만들어진 최초의 표음문자.


페니키아 문자: 기원전 11세기 ~ 기원전 149년. 아브자드로, 기원전 11세기부터 쓰여 점차 후예 문자들에게 대체되다가 기원전 149년, 카르타고(페니키아의 후신)의 멸망으로 쓰이지 않게 됨. 최초로 글자를 적는 방향을 통일한 문자. 아람 문자와 그리스 문자의 직계 조상.


아람 문자: 기원전 8세기 경 ~ 기원후 600년 경. 아브자드로, 기원전 8세기 경부터 서아시아에서 쓰이며, 당대 공용어로 쓰이는 아람어를 적는 문자였기에 널리 쓰이며 많은 후예를 두었고, 아람어 자체가 다른 언어로 바뀌며 아람 문자도 서서히 다른 문자로 변화해 기원후 600년까지 쓰임. 아시아의 동쪽으로 페니키아계 문자를 전파한 1등 공신.


그리스 문자: 기원전 8세기 경 ~ 현재. 알파벳으로, 기원전 8세기 경부터 서서히 여러 변종이 나타나며, 기원전 4세기 경에 현재의 모습으로 고정되었고, 이후로도 그리스 문화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그리스 밖에서도 널리 쓰이며, 그리스어가 동로마 제국의 공용어가 되며 전성기를 누리다가,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후 지금은 다시 그리스에서만 쓰이는 문자가 되었음. 하지만 고대의 문화를 바탕으로도 지금도 글자 자체는 수학, 과학, 예술을 가리지 않고 널리 활용됨.


로마자: 기원전 7세기 경 ~ 현재. 알파벳으로, 기원전 7세기 경부터 쓰이기 시작해, 로마 제국이 번성하며 지중해 전역과 서유럽에 퍼졌다가, 제국주의의 시대 때 또 한 번 폭발적으로 확산하며 전 세계에 퍼짐.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문자임.


브라흐미 문자: 기원전 3세기 경 ~ 기원후 400년 경. 아부기다로, 적어도 기원전 3세기 경에는 완성되었고, 아소카 대왕이 인도를 통일하며 세운 비석인 아소카 칙령들이 기원전 3세기 중반에 세워졌는데, 이때 이미 완성된 형태로 쓰인 것을 볼 수 있음. 언어가 진화하며 후예 문자들로 대체되어 기원후 400년 경까지 쓰임. 원시 시나이 문자와 연관성이 강하게 의심되나 확증이 없음.


히브리 문자: 기원전 2세기 경 ~ 현재. 아브자드로, 기원전 2세기 경부터 쓰여 히브리어를 적는데 쓰이며, 유대인의 강제 이주 후 히브리어가 일상 언어로 쓰이지 않게 되며, 히브리 문자 또한 종교용으로만 쓰이다가, 현대 이스라엘국의 성립 이후 히브리어가 일상 언어로 부활하며 히브리 문자도 부활하게 됨.


룬 문자: 기원후 2세기 경 ~ 중세/근대. 알파벳으로, 기원후 2세기 경부터 이탈리아의 문자를 게르만인이 받아들여 변형해 사용하기 시작한 문자로, 다양한 변종이 있으나, 대부분 중세 시대(10세기를 전후로 한 세기) 때 로마자에 대체되었고, 극히 일부의 룬 문자가 19세기까지 살아남음.


아랍 문자: 기원후 3세기 경 ~ 현재. 아브자드로, 아람 문자의 후예 나바테아 문자의 필기체에서 유래해, 기원후 3세기 경부터 쓰여 아랍어를 적는데 쓰이며, 아랍어가 이슬람교의 확장과 함께 널리 퍼지면서 로마자, 한자를 이어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사람이 쓰는 문자가 됨.


타밀 문자: 기원후 5세기 경 ~ 현재. 아부기다로, 기원후 5세기 경부터 쓰이며, 남부 인도의 여러 언어를 적는데 쓰이고 있다. 브라흐미 문자와 타밀 문자 중간 단계에 있던 문자는 동남아시아로도 퍼져 태국 문자 등의 조상이 됨.


가나: 기원후 9세기 경 ~ 현재. 음절문자로, 기원후 7세기 경부터 한자로 일본어를 적기 위해 한자를 사용하다가, 한자의 소리만 적기 위해 한자를 간략화한 것에서 유래함. 중국어를 쓰지 않는 한자문화권 전반에서 쓰이던 향찰/구결식 표기법에서 유래.


키릴 문자: 기원후 10세기 경 ~ 현재. 알파벳으로, 기원후 10세기 경, 불가리아 제1제국 시절 수도사들에 의해 만들어져, 슬라브인들의 문자가 됨. 현재도 슬라브어족에 속하는 많은 언어들(러시아어, 불가리아어, 우크라이나어, 세르비아어 등)을 적는 문자로도 쓰이며, 소련의 영향으로 중앙아시아의 여러 언어(몽골어, 카자흐어, 우즈베크어 등)를 적는데도 쓰임.


데바나가리 문자: 기원후 12세기 경 ~ 현재. 아부기다로, 기원후 12세기 경부터 쓰이며, 북부 인도의 여러 언어를 적는데 쓰이고 있음. 브라흐미 문자의 조상인 싯담 문자는 벵골 문자 같은 후예를 많이 가지고 있으며, 싯담 문자의 조상인 굽타 문자는 파스파 문자 같은 후예가 많음.


한글: 기원후 1443년 ~ 현재. 자질문자로, 이번 장에서 다룬 것처럼 독특한 점이 많은 문자 체계.

정말 길었네요! 문자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역사, 어떠셨나요? 이것보다 재미있게 각 문자 체계의 특징을 빠르게 알고 싶으시다면 1막의 막간 소극 『토트와 창힐의 만담』을 보시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그럼 이걸로 이번 장과, 언어의 역사 미니 시리즈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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