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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랑크톤 Jan 20. 2024

나는 사실 잊혀지고 싶지 않아

그 누구보다 나는 나에게 잊혀지고 싶지 않아

뭉크 - 절규

사람들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한채로 방황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하곤 했다. 원래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은 내 존재의 현존성을, 실존성을 내 스스로 증명하여 나는 살아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세상의 것들을 믿을 수 없고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어지러운 세상이지만 나는 나로 살아남아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작년 1년간 일을 하며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많이 떠나보냈다. 조금 인사를 하기 시작하면 작별을 곧 하게 되는 그들이었다. 처음에는 그들과의 작별이 무척이나 아쉬워 나를 잊지 말아달라는 말과 자그마한 선물을 주곤 했다. 나에게 있어 이들은 첫 직장 동료였고 사실 친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명, 두명 더 퇴사를 하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다보니 꽤나 혼자 싱숭했다. 꽤나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익숙해지는 것도 같지만 사실 잊혀진다는 것이 꽤나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만 나는 항상 나의 족적을 남기고 싶었고 나와 만난 이들에게 어떠한 기억으로 남아 살아남아있고 싶었다. 내가 죽더라도, 나와 만나지 않더라도 나라는 사람을 누군가가 기억해주고 떠올린다면 그 또한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랬다. 하지만 그들에게 나는 지나가는 직장 동료였고 나 또한 그들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공평한 것이다. 나만 그들을 특별히 여긴다하여 돌아오는 것도 없을 뿐더러 앞으로 이런 일들이 많아질텐데 하나하나 곱씹으며 힘들어하면 결국 나만 힘들어지는 것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잊고 잊혀지는 것에 무뎌질 때즘 인스타를 다시 떠올리고 일기장을 다시 펴게 되었다. 난 주변인들에게 남아있고 싶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나의 기억, 나의 생각,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상기시키기 위해서 항상 글을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위험한 말이나 좀 괴기한 말들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그런 것들을 오픈하여 남들에게 잊혀지고 싶지 않다고 발악을 해왔다. 일기장 또한, 내가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 써내려간 어쩌면 그냥 발자취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 그냥 내 기억을 내가 할 자신이 없으니 남긴 보험과도 같은 개념. 그래, 나는 그냥 잊혀지는 것이 두려워 이런 것들에 매몰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살아남아있다는 것을 사실 타인과 타자화된 나에게 맡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살아있음을 당신들이 알아달라, 심지어는 과거의 내가 살아있었음을 지금의 내가 알기를 바라며, 지금의 내가 살아있음을 미래의 나에게 맡겨두며. 


모두를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없고 모두에게 기억될 수 없음을 이제 알게 된 것이다. 애초에 가능성도 없는 것인데 나는 순진하게도 그러기를 바랐다. 1년간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야 그 두려움을 쳐다보게 되었다. 나는 잊혀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스스로 현존성을 증명하는 것이 맞다고 하면서 사실은 누구보다 타인들에게 나의 존재를 맡기고 있던 것이다. 그 지옥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게 그 두려움을 직시하는 것보다는 훨씬 편한 길이었기에 탈출할 생각도 없이 지옥을 열심히 헤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혼자 살아남을 자신은 없다. 그래서 블로그나 브런치라도 쓰는 것이다. 또한, 일기도 멈추지는 않을 듯 하다. 하지만 인스타나 페이스북과 같은 sns는 내리기로 했다. 나를 아는 이들에게는 서서히 잊혀지는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적당히 아는 이들에겐 잊혀지며 나를 찾는 이들은 따로 연락을 하겠지. 그러다 몇명 안남게 될 것이고 그들과는 마지막까지 남아있을 수 있을테다. 아니, 사실 혼자 남을 수도 있겠다. 내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맡기던 나는 그 지옥에서 죽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훌륭하게 살아남는다는 뜻이 아니라 나는 결국 타인들에게 잊혀져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너무나 두렵고 힘들다. 마지막으로 잊혀지는 것은 타자화된 내가 나를 잊으며 죽어가는 것이다. 이 끝은 정해져있고 누구나 맞이해야하는데 난 이를 언젠가 쳐다볼 수 있을 것이라 믿지 않는다. 항상 무서워할 것이고 두려워할 것이다. 살아있음에 몸부림치며 동시에 괴로워하는 것을 반복하지만 나를 잊는다는 것은 그 이상의 초월된 공포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 공포는 날 잡아먹어 가끔은 그냥 충동에 기대라는 유혹을 하기도 한다. 순간의 미쳐버린 충동은 많은 용기를 주고 다시 생각할 틈도 없이 행동으로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에 차라리 두려운 이 세상에 살아남으려 하지말고 한 번의 충동으로 자유로워지라 한다. 물론 진정되면 이런 생각을 했던 내가 가장 낯선 타인과도 같지만 어쨌든 나는 살아남았다. 


어디로 이어져있는지 모르는 미로에 불빛마저 꺼졌다면 암순응이 되길 기다릴 수 밖에 없다. 빛이 켜지거나 출구를 알려주거나 그런 요행은 없다.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뿐더러 있다고 한들 나한테 와줄리가 없다. 아니 와주리라 믿으면 실망만 커질 뿐 잃기 싫다면 바라지도 않는 것이 맞다. 그냥 그 곳에 적응하여 걸어가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그 곳에 있다는 것조차 모두가 잊고 나 조차도 여기가 어딘지 기억하지 못할 때 그 때가 마지막 순간일 것이다. 그 순간이 내가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인공인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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