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지운다_러다이트
3. 악몽이다. 근래[592], 이 악몽을 꾸는 시기는 짧아진다. 아무래도 교회 뒷문으로 들어가는 젊은 여자를 본 뒤로다.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인다. 일요일에 가끔 예배를 드린다. 하지만, 교회 성도는 아니다. 주위 사람에게 물어도 누구도 여자의 정체를 모른다. 뒷문을 지나면 넓은 공터가 나온다. 매일 같이 그곳을 드나들며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들어가면 나오지를 않는다. 한번은 궁금해 그녀를 따라 뒷마당으로 갔다. 뒷마당은 관리가 안 된 무성한 잡초로 그득하다. 그리고, 그녀는 사라졌다. 바로 따라갔는데, 이럴 수는 없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뒷마당은 교회 문을 제외하고는 출입구가 없다. 사방은 자연이 빚은 절벽으로 막혀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성한 잡초를 살펴도, 상상한 비밀의 문은 없다. 도대체 이 젊은 여자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어디로 나오는가? 혹시 절벽을 타고 올라가나? 그렇게 빨리? 말도 안 된다. 아니면, 나만 보이는? 귀신?
“목사님, 아침에 뒷마당으로 출근하는 젊은 여자가 보여요?”
“그 자매님은 왜요?”
“그러니까, 보이시냐고요.”
“그럼요, 아직 그렇게 늙지를 않았어요.”
“확실하지요?”
귀신은 아니다. 목사님도 보인다고 하니까. 그런데, 도대체 어디로 사라지는가? 다음에 예배 보러 오면 묻는다. 반드시. 궁금해 미치겠다. 주기가 짧아지는 악몽도 힘들고.
“안녕하세요, 자매님.”
대꾸가 없다. 못 들었나? 조금 더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 자매님.”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왼쪽 눈 밑의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생각보다 더 어려 보인다. 수척한 건지, 피부가 원래 흰지 알 수 없다. 이런 여자, 아니 소녀가 절벽을 탔을 리 없다. 다만, 고민이 많은 얼굴은 틀림없다.
“저 말씀입니까?”
소녀와 어울리지 않는 말투다.
“네, 자매님. 안녕하세요. 가끔 교회에서 뵌 것 같은데, 인사가 늦었네요.”
“아닙니다, 그럼.”
내가 뭘 잘못했나? 자리를 급하게 뜨려 한다.
“자매님, 청송동에는 급할 게 없는데, 하하하, 제가 불편하세요?”
“미안합니다. 근무 중입니다.”
“예배 보러 온 게 아닌가요? 근무 중이요? 일요일에요?”
“미안합니다. 더는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황급히 자리를 뜬다. 그나저나 이런 성격이었어? 낯을 가리나? 아니면, 내가 싫은가? 왜? 오늘 처음 봤는데. 아저씨라서? 아니, 볼품없어서?[593] 아, 모르겠다. 여하튼, 귀신이 아닌 건 확실해. 다음에 물어본다. 꼭. 내가 왜 싫은지.
“형제님, 청송동 생활은 어떠세요?”
“목사님, 안녕하세요.”
인자한[594] 미소다. 따라 하기 어려운 미소다. 이런 미소를 띠려면, 어떠한 생각을 지닌 삶을 살아야 할까? 목사님의 미소는 잠시나마 불안을 사라지게 한다. 청송동에서 둥지를 트는 게 바른 선택일까? 하루에도 숱하게 거울을 보며 묻는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가짜일지도 모른다고 가끔 생각해서다. 삶의 방향은 어떻게 정해질까? 우리는 두 가지 마음을 지닌 채 살아간다. 의식과 무의식이다. 의식과 무의식은 공존[595]한다. 이들은 ‘선택’이라 불리는 정류장에서 머문다. 인간은 ‘선택을 결정했다.’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선택을 결정당했다.’가 적절한 표현이다.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늙어가는 기쁨일지도 모른다. 의식은 구색[596]이고, 모든 선택은 무의식과 상의 후 결정된다. 최종승인자는 무의식이다. 무의식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어디로 이끌고 가려는지 묻고 싶어서다. 그럴 때마다 거울을 본다. 그리고 묻는다. 가려는 방향이 문제가 있다면, 말해 달라고. 물론, 대답은 없다.
“준서 형제님이 이곳에 온 지도 벌써 반년, 그 정도 되었네요. 마을 사람들하고는 좀 친해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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